대정향교에 주자 글씨 걸어 교육 독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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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표해록·대정현감 변경붕
변경붕, 만경현령 때 가뭄 피해…대용작물 재배해 기민 구제
장한철, ‘표해록’에 해적에게 약탈 당해 고초 겪은 경험 담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 있는 대정현감 변경붕 묘역. 1756년 중문 천제연 근처 마을에서 태어난 변경붕은 대정현감으로 부임해 교육 환경 개선에 힘쓰다 1813년 8월 제주를 떠났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 있는 대정현감 변경붕 묘역. 1756년 중문 천제연 근처 마을에서 태어난 변경붕은 대정현감으로 부임해 교육 환경 개선에 힘쓰다 1813년 8월 제주를 떠났다.

지난 호에서 대정현감을 지낸 장한철에 대해 소개했었다. 이어서 장한철의 표해록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표해록 일부 내용

1771년 1월 1일 맑음: … 푸른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아랫도리는 가리지 않았다. 윗도리엔 검고 긴 옷을 걸쳐 입었다. 아뿔싸, 왜놈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배는 우리가 있는 섬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우리 일행의 울부짖는 소리에 그 배가 멈추더니, 10여 명의 장정이 탄 작은 배가 우리 섬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허리에 길고 작은 칼들을 차고 얼굴 생김새는 험상궂고 사나웠다. 그들은 우리 일행을 포위하더니 글을 써서 물었다. ‘너희는 어느 지방 사람인가?’ 내가 글로, ‘우리는 조선인인데, 이곳에 표류해 왔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구해주시오. 귀하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고, 지금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소?’ 하고 물으니, ‘나는 남해 부처님이며, 장차 서역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보물을 바쳐 우리에게 사정하면 살려줄 것이로되,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바람을 잘못 만나 바다에서 표류해 만 번 죽을 고비에서 배 위에 있던 물건들도 이미 바닷속에 빠져버렸다. 이제 몸뚱이 외에 다른 물건은 갖고 있지 못하다.’ 하니, 왜놈들은 칼을 휘두르고 큰소리를 내지르며 내 옷을 모두 벗겨 몸을 나뭇가지 위에 묶고 거꾸로 매달았다. 또한, 우리 일행 여러 사람의 옷도 벗겨 거꾸로 매달았다. 그들은 우리 일행의 자루 속을 뒤져 진주와 전복도 훔쳤다. 단지 먹을 쌀과 옷가지만 남겨두고 서로 지껄이더니 작은 배를 타고 이내 떠났다. 일행들은 손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나를 풀어주었다. 마치 죽었다 살아나서 상봉한 듯했다. 

제주시 애월읍 한담마을에 있는 장한철 산책로 표지석.
제주시 애월읍 한담마을에 있는 장한철 산책로 표지석.

1771년 1월 6일 바람: … 사공 이창성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밧줄로 몸을 묶고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창성이 하는 것을 보고 놀라 큰 소리로 곡소리를 일제히 냈다. 모두가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길 ‘우리가 호산도에 있을 때 나쁜 일을 만난 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소. 지금 나쁜 운이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다시 죽을 고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오. 하지만 죽을 운명 다음엔 분명 살아날 운명이 따를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살길을 버리고 죽으러 하는 짓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니, 그가 울면서 말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바닷길을 잘 압니다. 노화도의 북쪽은 험한 해안입니다. 비록 바람 없는 날이라 해도 배가 암초에 걸리면 파손되어 침몰합니다. 암초들은 깎아지른 듯 날카롭고 파도가 하늘을 흔들고 있으니 배는 침몰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를 다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사공 이창성의 말을 들으니 나도 덩달아 안정을 찾지 못했다. 소리 내어 울고자 하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를 토한 나는 어지러워 쓰러진 뒤 깨어나지 못했다. 나도 이미 저승길에 들어선 사람이 되어 혼미한 정신으로 꿈결에서 두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2년 전 바다에서 죽은 같은 마을 사람 김진용과 김만석이 나에게 말했다. ‘쓰고 있는 탕건을 나에게 주지 않겠소?’… 두 사람이 어른거리다가 귀신 도깨비들이 이상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고, 이내 머리에서 혼이 빠져나간 듯한 나는 죽음과 삶 사이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 간에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하얀 옷을 입고서 내게 밥을 갖다 주었다.…(아름다운 여인은 귀신이 아닌 조씨였다. 조씨는 청산도 당촌에 사는 20세의 미망인이었다. 실제로 장한철을 만나 정을 나누고 5년 후를 기약하는 사이가 되었다.)

▲대정현감 변경붕

1756에 태어난 변경붕은 제주입도조인 고려 무신 변안열의 14세손이다. 중문 천제연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 대정현 도원리로 거주지를 옮긴 변경붕은, 11세에 아버지 친구이자 정의훈장 출신인 김명헌(다음 소개)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다음은 11살에 변경붕이 지은 ‘靜坐聽蟬鳴(정좌청선명): 조용히 앉아 매미 소리를 들으니’라는 시이다.

聲聲報秋新(성성보추신): 소리마다 가을이 옴을 알려주는 구나 / 莫言生糞土(막언생분토): 더러운 흙에서 살았다고 말하지 말라 / 脫穀化仙身(탈각화선신): 껍질을 벗고 나면 신선이 되리니

1779년 향시에 합격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변경붕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2달 만에 한양에 도착했으나, 과거에 낙방해 제주로 돌아온 1782년, 부모를 모두 잃었다. 

부모님 3년 상을 마친 변경붕은 공부를 멀리한 채 아이들을 가르치고 산천유람으로 소일을 하던 중, 1790년 제주목 천거로 향교훈장을 지냈다. 그러던 중 갑인년 흉년의 해인 1794년 제주위유안핵순무시재어사 심낙수가 내도해 열린 과거(제주에서 문과 7명, 무과 10명 급제, 문과 論에 변경붕, 策에 부종인, 詩에 고명학, 賦에 홍달훈, 銘에 이태상, 頌에 정태언, 특히 策에 2위를 한 김명헌은 정조의 특명으로 급제, 당시의 論題는 觀於海者難爲水임)에서 급제하고, 식년전시(式年殿試)에서도 병과로 급제했다. 

식년전시(3년마다 궐내에서 왕이 친림 하에 치르는 과거) 급제 후 효릉별검과 창락도 찰방 등을 지내던 변경붕은 의금부의 연명상소에 연루돼 1798년 명백한 죄목도 없이 방축향리형으로 파직당했다. 방축향리형이란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는 형벌이다. 

변경붕은 1800년 죄를 벗었고 8월 복직통보를 받았다. 1804년 이후 성균관 전적, 직강, 대정현감, 만경현령, 사헌부 장령, 이조참의(정3품 당상관)를 지냈다. 문장과 복술에 능통했다고 전하는 변경붕은 전라도 만경현령 재임 시 가뭄 대책으로 대용작물의 재배를 권장해 기민을 구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그곳에 공덕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대정향교 명륜당 전경. 변경붕은 대정향교 명륜당에 주자필을 본뜬 현판을 만들어 내걸었다.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대정향교 명륜당 전경. 변경붕은 대정향교 명륜당에 주자필을 본뜬 현판을 만들어 내걸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1811년 2월 대정현감으로 부임해서는 특히 대정향교 명륜당에 주자필을 본뜬 현판을 만들어 교육 환경을 개선하다 1813년 8월 떠났다. 제주의 석학 심재 김석익은 파한록에서 변경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변경붕은 급제하여 만경현령이 되었는데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났다. 만경현에는 땅이 많아 주로 벼농사를 지었는데, 벼농사에는 종묘 이양법을 사용했다. 공이 가물 징조를 미리 알아 3월에 모내기를 하며 고생하지 말라고 백성들에게 권하자, 처음에는 이를 괴이하게 여겨 비웃으며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세월이 지나자 크게 가물어 수확기임에도 한 알의 곡식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변경붕이 권하는 시기에) 파종했던 사람들은 온전하게 많이 거둬들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여 실로 공이 가르쳐 이끌어 권장한 공로라고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도 공을 신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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