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희생자 추정 유해 3구 발굴
4·3희생자 추정 유해 3구 발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군섭씨 “강원길·김계화·강홍구 외 1명 묻혀”
제주자치도·4·3평화재단 31일 현장보고회 개최
신원 확인과 추가 작업 진행키로
31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인근 과수원에서 4·3희생자 유해발굴 현장 보고회가 진행되고 있다. 고봉수 기자 chkbs9898@jejunews.com
31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인근 과수원에서 4·3희생자 유해발굴 현장 보고회가 진행되고 있다. 고봉수 기자 chkbs9898@jejunews.com

제주4·3 당시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잿더미가 되고 양민이 학살된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73년 만에 희생자 유해가 발굴됐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31일 표선면 가시리 2227번지 속칭 ‘우구리동산’에서 3구의 유해가 발굴됨에 따라 현장 보고회를 열었다.

유해 3구는 가시리마을에서 이웃이었던 강원길씨(당시 48세)와 김계화씨(32·여), 김계화의 아들 강홍구(11)로 추정됐다.

희생자들은 초토화 작전이 한창인 1948년 12월 21일 마을 인근 동굴에 피신했던 주민들로 10대와 여성들도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됐다.

4·3평화재단은 마을 주민 강군섭씨(79)의 증언을 토대로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유전자 감식을 통한 유해의 신원 확인은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이숭덕 교수가 맡기로 했다.

유해 발굴을 실시한 일영문화유산연구원 박근태 원장은 “증언을 토대로 발굴을 한 결과, 유해 3구와 고무신 등 유품이 발견됐다”며 “이곳 주변은 천연동굴과 움집이 많아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가시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73년 전 가시리마을은 360여 가구에 이르면서 중산간지역에서 비교적 큰 마을이다.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에 이어 해안선에서 5㎞ 밖 중산간마을은 적성지역으로 간주, 토벌대가 초토화작전을 벌이면서 가시리마을은 잿더미가 됐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들을 표선초등학교에 집단 수용했으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은 중산간 동굴과 움막 등에서 숨어 지냈다.

토벌대는 1948년 12월 22일 표선초민학교에 수용했던 가시리 주민 76명을 속칭 ‘버들못’으로 끌려가 집단 학살했다. 이들은 가족 중 일부가 입산했거나 도피했다는 이유로 대살(代殺)을 당했다.

가시리마을 희생자는 421명으로 노형리(538명), 북촌리(446명)에 이어 3번째로 양민 피해가 많았다.

4·3평화재단은 이날 수습되 유해를 4·3평화공원 내 유해 봉안관에 안치한 후 신원 확인과 함께 유족을 찾기로 했다.

재단은 또 4·3당시 희생자들이 집단 암매장됐다는 증언과 사료를 통해 제주시 노형동과 서귀포시 색달동·영남동·상예동·시오름 등에서 유해 발굴 작업에 나선다.

재단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총 405구의 4·3희생자 유해를 발굴했으며, 유전자 감식을 통해 133구(33%)의 신원을 확인했다.

신원이 밝혀진 유해는 ▲1949년 군사재판 사형수 74명 ▲서귀포 3면(서귀·중문·남원면) 예비검속 희생자 27명 ▲모슬포 예비검속 7명 ▲9연대 군인 2명 ▲민간인 23명 등 모두 133명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