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한국 불교계의 큰 별…세계 평화·불교 확산에 힘써
(182) 한국 불교계의 큰 별…세계 평화·불교 확산에 힘써
  • 제주일보
  • 승인 202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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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태환, 일본 천황 비판 기사 투고…해녀 항일 투쟁 연루돼 옥고
 부항석, 추자도서 교직 생활하다 1952년 2월 북제주군수 발령
 색자니, 안질 치료 재능 알려져 상경해 내의원 의녀로 임명받아
 서경보, 동국대 불교대학장 등 역임…미국·중국 등서 포교 활동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중턱에 있는 산방굴사의 모습. 서귀포시 도순마을에서 태어난 서경보는 19세 때 산방굴사 혜월 스님 문하로 출가한 후 약 1년간 제주에서 수행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중턱에 있는 산방굴사의 모습. 서귀포시 도순마을에서 태어난 서경보는 19세 때 산방굴사 혜월 스님 문하로 출가한 후 약 1년간 제주에서 수행했다.

▲부태환夫泰煥:1908(융희2)~?, 항일 활동, 본관 제주.

부달화(夫達化)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대정읍 신도리(동-뒌개)에서 태어났다.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진학, 최우등생인데 재학 중 항일(抗日) 학생으로 지목돼 1928년 3월 졸업 직전에 퇴교 처분을 받았다.

그는 1928년 2월 12일 제주읍 일도리 고영희(高永禧) 방에서 하숙을 하면서 제농(濟農) 2년생 장길수(張吉壽), 진택주(秦宅周), 3년생 김상추(金商秋) 등과 자신의 의견을 신문에 투고하기로 결의했다. 부태환은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기사(不敬記事)를 작성, 동아일보에 투고할 목적으로 동년 2월 13일 제주읍 삼도리 백경숙(白京淑)의 집에 제주 조선인기자단이 설치해 놓은 투서함에 집어넣었다. 

경찰은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1928년 3월 3일 3학년생 김상추, 부태환 외 수명을 소환해 필적 조사·가택 수색을 하고, 제주청년회 집행위원 김정로(金正魯), 윤석원(尹錫沅) 등을 소환해 취조한 결과 부태환이 기사를 작성했음이 밝혀졌다. 이 일이 발각돼 동월 10일 광주지법 검사국에 송치됐다.

그는 1930년 제주읍 일도리의 강국화(姜菊花)와 결혼했다. 1931년 4월에는 성내지부 청맹원(靑盟員)들과 함께 친일 단체로 보여지는 ‘부녀 동화회’에 들어가 간판을 떼어 버리고, 회의를 방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검거됐다. 

1931년 음력 정월 초순 부태환 집에서 강창보(姜昌輔), 김민화, 김순종, 김한정, 장종식 등이 모여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자 간담회’를 개최, 앞으로 농민·여성 등에 대한 운동으로 전환할 것으로 협의했다. 이에 후일 강창보에 의해 제주 야체이카가 조직됐다. 1931년 7월 장종식(張鍾植)과 부태환을 제주도 야체이카 당외분자로 가입시켜, 혁우동맹(革友同盟)의 재건을 도모했다. 그러던 중 1932년 1월 해녀 항일 투쟁이 구좌 일대에서 일어나자 그 배후 조종 단체로 지목됐다. 강창보는 체포돼 1933년 6월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행방이 묘연해졌다.

▲부항석夫恒錫:생몰년 미상, 개량서당 교사, 북제주군수, 제주대학 서무과장.

구좌읍 상도리(도려)에서 태어나 1918년 3월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해 추자(楸子)도의 개량사숙(改良私塾·4년제) 교사로 재임했다. 

최승만(崔承萬) 도지사 당시인 1952년 2월 28일에 북제주군수 발령을 받았다. 

 

 

 

 

 

▲색자니塞自尼:생몰년 미상, 세종 때의 내의원 의녀(醫女). 

본시 정의현 태생으로서 안질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430년(세종12) 12월 제주목사 김흡(金洽)에게 전지가 내려와 상경했다. 말을 내어 주면서 남편과 자녀들까지 함께 올라오도록 하고 그녀를 내의원(內醫院) 의녀로 임명했다.

▲서경보徐京保:1914(일제강점기)~1996, 승려, 학자, 일붕(一鵬), 1962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해 1969년에 동교 불교대학장에 취임, 선교종(禪敎宗) 종정, 세계불교법왕청 법왕(法王), 본관 이천, 법명 일붕.

장례는 1996년 7월 1일 동국대학교 교정에서 종단장(宗壇葬)으로 치러졌고 다비식(茶毘式)은 경남 의령(宜寧)에 있는 일붕사(一鵬寺)에서 거행됐다. 

입적하기 직전까지도 중국·미국 등지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1955년에는 세계평화교육자협회(IAEWP)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바 있다. 그는 1996년 6월 25일 서울 신영동 소재 법왕청에서 세속 나이 83세, 법란 64세로 입적했다. 그는 126개의 박사학위, 1042권의 저서, 757개의 통일기원비 건립, 50여 만점의 선필(禪筆), 최대 석굴법당 건립 등 5개 분야에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서귀포시 도순(돌숭이)마을의 엄격한 유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몸이 계속 아파 태몽의 뜻을 따라 19세 때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 안덕면 사계리의 산방굴사에서 혜월(慧月)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면서 불교와 첫 인연을 맺게 됐다. 출가 때 받은 법명은 회암(悔巖)이며, 약 1년 간 제주에서 수행하던 그는 1933년 화엄사의 진응(震應) 강백을 찾아가 수학했다. 

1935년 진응이 완주 위봉사(威鳳寺) 강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도 따라가 그곳에서 사미과·사집과를 수료했다. 이때 위봉사 주지로 있던 춘담(春潭)은 그를 법제자로 삼았으며 일붕이라는 법호를 지어 줬다.

서경보는 재정 형편상 위봉사 강원이 문을 닫게 되자 춘담의 권유로 서울 개운사(開運寺) 박한영(朴漢永) 문하로 들어가 3년여에 걸쳐 사교과·대교과의 가르침을 받았다. 

1943년 1월부터 ‘불교’지에 고승전설에 대한 글을 연재하기 시작, 나옹(懶翁) 왕사(王師)의 진적(眞蹟), 달마(達磨) 조사 사행관(四行觀) 현토(懸吐) 등을 발표했다. ‘불교시보’에는 관음영감록(觀音靈感錄), 말없는 설법, 백의 대사 신주(神呪)의 공덕 등을 계속 발표했다. 일제 당국이 전쟁 수행에 협조하도록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친일적인 문장은 쓰지 않았다. 

그는 1944년 당시 월정사에 출강하던 김태흡(金泰洽) 교수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46년까지 교토(京都) 임제종 임제전문학교(臨濟專門學校) 철학과를 수학했다. 귀국 후 종로구 창신동의 안양암 포교 법사로 있으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해 1950년 졸업했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전북대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1953년 해인대학(현재 경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1956년부터 동아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했다.

대학 강단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던 그는 한편으로 활발한 국내외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1962년 한국불교청년회 총재로 추대됐으며 같은 해 불국사 주지로 취임했다. 미얀마·독일·스리랑카·영국·미국 등지의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활동했다. 아울러 1958년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제5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미국에 사찰을 건립하는 등의 활발한 포교 활동은 양국간 문화 교류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미 대통령 레이건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한때 조계종 원로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1988년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을 창종(創宗)하면서 조계종단을 떠났다. 이후 일붕선교종의 종정을 지냈으며, 1992년에는 그가 계속 추진해 오던 세계불교법왕청 설립 총회가 개최되자 초대 법왕(法王)에 추대됐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정회원 16개국 대표가 참가했던 1차 총회에 이어 1994년 개최된 제2차 대회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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