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대흉년 통해 벼슬…구휼·교육 진흥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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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대정현감 고한록·부종인
기민 구제에 쌀 300석 헌납한 고한록, 특차로 대정현감 제수 
부종인, 재난 위무하고자 시행된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 받아
동계 정온 적거 터에 ‘열락재’ 세워 선비 양성…청렴해 칭송
제주시 아라일동에 있는 대정현감 고한록과 그의 부인 전주 이씨의 합묘. 고한록은 1794년 갑인년 대흉년에 쌀 300석을 국가에 헌납해 1795년 대정현감으로 제수됐다.
제주시 아라일동에 있는 대정현감 고한록과 그의 부인 이씨의 합묘. 고한록은 1794년 갑인년 대흉년에 쌀 300석을 국가에 헌납해 1795년 대정현감으로 제수됐다.

▲갑인년 흉년 구휼(救恤)

1794년 갑인년 흉년 당시 100석 이상 구휼미를 기부한 사람은 김만덕, 고한조(록), 홍삼필, 양성범 등 4명이다. 유학(幼學) 양성범과 같이 1794년 각각 양곡 100석을 희사한 홍삼필에게, 조정에서는 그 의연(義捐)함을 칭찬해 순장(巡將)이란 벼슬을 내렸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제주에 흉년이 들어 을묘년(1795년) 10월 진휼을 시작하여 동년 4월 마쳤다. 세 고을의 기민 5만1303명에 소요된 곡식은 3만5123석이었다. 이 일을 목사 유사모가 계문(啓聞)하니, 제주 판관 조경일은 논상(論賞)하고, 대정현감 고한록은 승품하여 서용(敍用: 죄를 지어 면관된 자를 다시 등용함)하고, 정의현감 홍상오에게는 아마(兒馬)를 하사하고, 진휼을 보조한 전 순장(巡將) 홍삼필은 섬 안의 두 고을 수령 중에서 한 곳에 임명하여 보내라.”고 명했다.

전 정의현감 고한록이 쌀 300석을 의연한 공로로 대정현감에 특차(特差)된 바 있었는데, 그 예에 의해 고한록의 임기가 끝나자 홍삼필이 대정현감에 제수(除授)돼 1798년 2월 부임하고 동년 12월 떠났다. 양성범은 1795년 주린 백성을 구휼하니, 1798년 대정현감에 특별히 제수됐다. 

위에 소개한 대정현감 중 제주에서 적지 않게 회자되는 고한록(조) 대해 소개한다. 

제주에서 유일하게 문왕팔괘도가 새겨진 고한록의 거북등 비석.
제주에서 유일하게 문왕팔괘도가 새겨진 고한록의 거북등 비석.

▲대정현감 고한록(조)

제주대학교와 제1횡단도로 교차로 동쪽 언덕(아라일동 429)에 고한조와 그의 부인 전주이씨를 모신 합묘가 있다. 인근 지역에 초장(初葬)을 했다가 1834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해 부인과 합장했다. 1955년 세워진 다른 석물들과는 달리 총알 흔적이 있는 비석은 원래의 비석으로, 4·3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한조의 부친인 고취선은 상당한 부자였다. 1762년(영조 38)에 무과에 오른 고한조는 훈련원 첨정(僉正)을 거쳐 정의현감과 대정현감, 강화부 중군, 강원도 감영의 중군을 지냈다. 1793년(정조 17) 7월 정의현감에 임명된 고한조는 같은 해 12월 사간원의 상소로 파직되기도 했었다.

1794년 갑인년 대흉년에 고한조는 쌀 300석(김만덕 500석)을 국가에 헌납하니 1795년 대정현감으로 제수(除授: 임금이 벼슬을 내림)됐다. 고한조는 명월만호 시절 쌀 수백석을 바친 적이 있었다. 대정현감 재직 시 고한조는 대정현성 안에 서당을 설립하고 달마다 쓸 경비를 마련해 유학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했다. 이 서당은 후에 다음에 소개되는 부종인 현감에 의해 열락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같은 해에 고한조는 대정현성 동문에 동문루를 중수하고, 1797년 6월 대정현 해안에 류쿠인 7명이 표착하자 선박을 수리토록 해서 해로로 환송했다. 고한조의 아들 창빈과 손자 성규도 무과에 급제해 대정현감을 지냈다. 

제주도 향토유형유산 제12-41호로 지정된 부종인 묘비.
제주도 향토유형유산 제12-41호로 지정된 부종인 묘비.

▲대정현감 부종인

갑인년 흉년으로 알려진 1794년은 제주에서 수많은 기아자가 발생한 해이다. 정조는 이러한 상황을 위무하고자 심낙수 어사를 제주에 파견해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문과에 7명, 무과에 10명을 시취했는데, 이전에 소개한 81세 김명헌 공이 2등을 한 책(策) 분야에서 부종인은 1위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다음은 부종인에 대한 내용이다.

서귀포 토평에서 태어난 부종인(1767~1817)은 예조정랑, 경상도 자인현감, 성균관 사성 등을 거쳐 1799년 앞서 소개한 홍삼필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부임하고 특히 교육 진흥에 힘을 쏟곤 1801년 8월 떠났다. 

부종인은 대정현감 재임 중 대정서당을 동계 정온이 살던 곳으로 옮겨 열락재(悅樂齋)라고 이름 짓고 교육에 힘썼다. 청렴결백하고 학문을 일으켜 선비를 양성한 부종인은 현민들로부터 칭송을 크게 받았다. 정조는 과거에 합격한 관원들에게 두 달에 한 번씩 시험을 보게 했는데, 부종인은 두 번이나 장원을 했다. 그래서 정조는 부종인에게 말을 하사하고 진급시키기도 했다. 

부종인이 서울에서 죽자 그의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서매수가 지었다. 1817년 부종인은 한양 참봉 서격수의 집에서 사망했는데, 서격수는 서매수의 사촌동생이다. 부종인의 묘는 서귀포시 서홍동에 위치했다가, 2013년 성산읍 오조리 소재 제주부씨도선묘역에 옮겨졌으며, 묘비는 제주도 향토유형유산 제12-41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묘역에는 자랑스런 조상의 공덕을 알리려는 안내문은 없었다. 

제주목사를 지낸 정관휘가 쓴 ‘悅樂齋記’에 등장하는 당시의 대정현의 교육환경과 대정현감 고한조, 부종인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내가 제주를 다스린 지 3년째 되는 해(1802년)에 대정 선비인 강만영 등이 글로 다음을 알려주었다. ‘대정에는 예전에 서재가 없었으나 병진년(1796년)에 고한조 현감이 목사 유사모와 의논하여 고을 안의 진리청을 구입, 처음으로 학생들이 학업을 닦는 장소로 정하곤 편액하여 열락(悅樂)과 진덕(進德)이라 하였고, 3년이 지난 기미년(1799년)에는 부종인 현감이 두 재(齋:열락·진덕)를 대정현 동쪽 1리쯤에 있는 동계정선생적려유허로 옮겨 짓고 편액하여 게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서재는 알맞은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숲과 골짜기가 그윽하고 고요하며 난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멀어지니 강습하는 학생들도 그들의 학업을 오로지 열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에 등장하는 정관휘 목사는 제주도에 표류해온 여송인(呂宋人: 필리핀) 또는 막가외인(莫可外人:마카오)들을 연경을 통해 돌려보냈다. 재임 중 송우암 적려유허비각을 건립하고 시노노비안(侍奴奴婢安)을 혁파했다. 또 공마의 수량을 특별히 감면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는데, 갑인년(1794년) 대흉년 이후 공마가 줄어든 것이 3000여 필이나 되므로 1500필을 3읍의 목마장 목졸(牧卒)로부터 징발하니 원성이 자자했다. 이에 정의현(삼달리) 출신인 강성익(당시 사헌부 지평)은 입궐해 ‘제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도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어 없어진 국마 1500필을 변상할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간절한 소청을 올리니, 정조임금이 특별히 이를 면제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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