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뿌리 된 남미 여행…인류애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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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졸업 앞둔 의대생 체 게바라, 친구와 8개월 무전 여행 떠나
부당한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 직접 만나며 성장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포스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포스터.

“난 그때 여섯 살 꼬마였어요. 어느 날 낯선 중년 남자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난 그가 아버지인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변장을 하셨기 때문에요. 물론 우리 자식들을 속이기 위해서였죠. 제가 의자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졌을 때였어요. 그가 절 안아주었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포근했어요. 그래서 전 어머니에게 말했지요. 엄마, 저 아저씨가 날 사랑하나 봐….” 

여섯 살 꼬마가 말한 ‘저 아저씨’는 체 게바라였다. 성인이 된 그의 딸 알레이다가 어느 TV와의 인터뷰에서 어릴 적 추억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체가 혁명 성공 후 쿠바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볼리비아로 떠나기 직전, 변장을 한 채 가족과 만나는 식사자리에서였다. 이 자리가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본인은 물론 가족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세상의 약자들을 위해 살았던 그의 40여 년 인생은 투쟁과 동시에 여행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볼리비아행은 그에게 마지막 여행길이 되고 말았다. 23세 의대생일 때 가슴 설레며 떠났던 남미대륙 종주가 그의 인생 첫 여행이었다. 8개월 동안의 이 여행이 이후 15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고국 아르헨티나를 떠나 쿠바에서 성공하고 이어 볼리비아로 향하는 마지막 여행길까지 오르게 된 건 바로, 그의 첫 번째 여행의 영향이었다. 

체 게바라 실제 모습.
체 게바라 실제 모습.

1960년 3월 어느 날 쿠바의 아바나 혁명광장에선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불행한 사고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쿠바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가 연단 위에서 추모 연설을 하고 있었고, 무명의 사진작가 코르다는 관객들 틈에서 그 모습을 찍고 있었다. 연단 한쪽에 잠깐 나타난 군인 한 명이 작가의 눈에 띄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베레모를 썼다. 어딘가를 노려보는 그의 눈매가 날카로웠고 베레모에 붙은 별 계급장이 인상 깊었다. 작가는 습관처럼 그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쿠바혁명 수뇌부 중 한 명을 찍었을 뿐인 이 사진은 30여 년이 지난 후 전 세계에 체 게바라 돌풍을 일으키게 된다. 사진을 찍은 작가 코르다가 로열티를 포기한다고 공언하면서부터였다. 그 돌풍은 사진의 작품성 때문이 아니었다. 사진 속 인물의 진정성 때문이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편한 삶이 보장될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에 합류했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세상의 모순을 고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혁명이 성공하고 쿠바 정세가 안정되자 정권 2인자로서의 권력을 버리고, 세상의 힘없는 민중들을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아프리카의 민중 해방을 위해 콩고로 달려갔고, 이어 남미 인디오들을 위해 싸우다 볼리비아에서 죽음을 맞았다. 

누군가는 그를 ‘관계 없는 나라들을 위해 투쟁하고, 관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관계없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만들어 나갔던 혁명가. 스스로 연마된 다이아몬드’라고 표현했다. 사르트르 또한 그에게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일개 평범한 의학도를 이렇게 ‘완벽한 인간’으로 고양시킨 첫 계단은 바로, ‘여행’이었다. 

졸업을 앞둔 의대생 체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와 남미대륙을 누비는 8개월 무전 여행을 떠난다.
졸업을 앞둔 의대생 체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와 남미대륙을 누비는 8개월 무전 여행을 떠난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그는 남미대륙 무전여행이란 치기어린 계획을 세우곤 친구이자 선배인 알베르토와 함께 먼 여행길에 나선다. 자신들이 속한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젊음이 식기 전에 직접 만나보고 싶은 열망에서였다. 고향집을 출발해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까지 올라가 종단하고 돌아오는 여정은 당초 일정보다 두 배나 길어졌다. 

20대 젊은이 둘이 중고 오토바이 한 대에 의존해 거친 비포장도로를 그렇게 오래, 그렇게 멀리 여행한다. 그들 앞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상상해볼 순 없지만, 일상에선 흔치 않을 어떤 ‘자각’이 있었을 거라는 짐작쯤은 쉽게 할 수 있다. 그의 8개월간의 여행일기를 토대로 만든 영화가 브라질의 월터 살레스 감독이 연출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20대 청년 의학도의 눈을 통해 남미대륙 전역의 풍광과 핍박 받는 민중의 모습을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냈다. 영웅이나 위인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여행을 소재로 한 ‘로드무비’를 말할 때 늘 선두에 꼽힐 만큼 작품성도 뛰어나다.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에서 여정은 시작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친 후 칠레 해안을 거슬러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의 대륙 북단까지, 50년 전 청년 체 게바라의 실제 여행과 똑같은 순서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수려한 영상미의 영화 한 편으로 남미대륙의 다양한 풍광들을 편안하게 앉아서 만날 수 있다. 군소 도시들은 물론 안데스 산맥과 잉카 유적, 중남미 광활한 사막과 광산지역 그리고 아마존 강을 뗏목 여행하는 등, 한 번 여행으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많은 여정들이 펼쳐진다.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들의 현실 삶의 모습은 젊은 체 게바라의 자각의 근간이 된다. 조상 때부터 밭을 일구고 살아오던 농부들이 부당하게 땅을 빼앗겨 떠돌고 있는 모습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질병으로 신음하는 노인들, 강을 건너는 좁은 배 안에서 발 디딜 틈 없이 짐짝처럼 붙어있는 인디오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과 격리된 채 고단한 삶을 사는 나병 환자들….

엔딩 장면의 독백은 그의 첫 여행의 결과를 압축해 보여준다. ‘길에서 지내는 동안 내 속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대륙 여행은 생각 이상으로 날 변화시켰다. 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과거의 나와 같은 난 이제 없다.’ 세월이 흘러 혁명가로 변신한 그는 우리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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