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인질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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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평론가/논설위원

영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뮤지컬「포 미니츠(Vier Minuten)」(양준모 제작)를 보았다. 뮤지컬을 보고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고통을 자세히 알 수 없어 원작 영화(크리스 크라우스 감독, 2006)를 찾아봐야 했다. 그리고 주인공 ‘제니’가 겪는 ‘경계선 인격 장애’가 궁금해졌고, 또 다른 여성 인물 ‘크뤼거’의 삶을 생각했다. 결국 문제는 여성들이 처한 삶이었다. 자연스레 『여자는 인질이다』(디 그레이엄 외)라는 책을 살펴봐야 했다.

‘제니’는 감정기복이 심하고, 비정상적 행동 패턴을 보이며,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타인을 공격했다. 남자친구 아버지를 살해한 죄수로 감옥에 갇히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며 진실이 드러난다. ‘제니’는 어려서부터 천재적 피아노 연주자였고, 그것을 알아본 양아버지는 강압적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게 했다. 12살 무렵 피아노를 거부하는 ‘제니’를 양아버지는 강간했다.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가 길거리에서 남자를 만나고 임신했다. 남자는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고, ‘제니’는 그 죄를 덮어주려 살인죄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크뤼거’는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60여 년간 가르친 인물이다. ‘제니’가 천재 피아니스트임을 알아보고 재능을 살리려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교도소를 드나들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치가 지배하던 시절 감옥의 간호사로 일했던 그녀는 ‘한나’라는 여성 재소자를 사랑했다. 피아노를 치며 즐거워하던 ‘한나’는 공산주의자라는 미명 아래 교수형을 당했다. 전쟁의 도가니 속에 스러져간 그녀를 그리워하여 ‘크뤼거’는 피아노와 교도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근원적 상처는 남자들의 폭력이 빚은 것이다. 그런데 왜 ‘제니’는 살인죄를 뒤집어쓰며 남자친구를 구하려 애썼던 것일까? 양아버지가 행한 강간에 대해 제대로 밝혀내 징벌하지 못하는 까닭은? ‘크뤼거’ 이야기는 오랜 역사를 두고 남성들의 광기가 빚어낸 약자 살해, 특히 여성 살인을 문제 삼으면서 지속적 여성 억압의 굴레를 환기한다.

『여자는 인질이다』는 인질극 사건을 배경으로 한 ‘스톡홀름 신드롬’을 여성과 남성 관계로까지 발전시켜 다룬 글이다. 인질극 과정에서 인질들은 인질범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경찰을 적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역설이 벌어진다. 그런데 실상은 인질범의 폭력이나 살해에 대한 두려움이 그런 상황을 연출케 했던 것. 이는 페미사이드(남성파트너의 여자 살해), 아내 학대, 강간, 친족 성폭력, 성추행, 빈곤 등 남성들이 자행하는 폭력이 두려워 여자들은 일종의 인질 상태 심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포 미니츠」의 ‘제니’가 생존을 위해 양아버지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성적 학대를 당하는데도 한동안 묵인해야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남자친구도 ‘제니’에게는 생존을 틀어쥔 존재였으므로, 살인죄를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크뤼거’의 전쟁 공포도 여성이 느끼는 인질 상태의 심리와 연결될 것이다.

『여자는 인질이다』에서는 인질 심리를 바꾸기 위해 여자가 갖는 공감과 연결의 힘, 여자의 시각을 또렷이 나타내는 언어, 남성 폭력에 대한 책임 묻기와 같은 노력을 주장한다. 「포 미니츠」의 ‘제니’와 ‘크뤼거’가 피아노를 통해 연대하고, 정서적 공감과 성취감을 ‘발명’하는 세계는 인질 심리를 극복하는 방식 중 하나다. 남자인 나에게 위로가 되는 책 속 표현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건강한 사랑을 되돌려주는 남자만을 사랑하도록”(41쪽)이 눈에 번쩍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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