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잘라 그 피로 어버이를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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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효자 문달민·달복과 열녀 오씨
세상 감복시킨 사랑…부모·배우자에 헌신해 표창받아
시부모와 죽은 남편에 정성 다한 열녀…정려문 세워져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에 있는 박성림의 처 오씨의 정문. 오씨는 남편과 어버이에 대한 정성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칭송받아 제주목사에게서 완문을 받았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에 있는 박성림의 처 오씨의 정문. 오씨는 남편과 어버이에 대한 정성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칭송받아 제주목사에게서 완문을 받았다.

정려(旌閭)란 충신이나 효자 또는 열녀 등을 널리 알려 풍속을 바르게 하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1988년 발간된 ‘제주선현지(濟州先賢誌)’에는 효자와 효부 그리고 열녀 200여 명이 소개되고 있다. 그중 대정현에서 자주 회자되는 효자 문달민·문달복 사촌 형제와, 그곳 가까이에 세워져 있는 오씨 정려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또한, 이곳에는 제주 최초의 목사인 이도종 순교비도 조성돼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곶자왈 지역도 있다. 특히 오씨 정려문 주변에는 오래전 백일홍 10여 그루가 심어져 있어 아름다운 선행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더하고 있다. 제주도에 있는 수백의 정려비 중에서도 가장 특색 있는 정려문들이 있는 이곳(무릉리·신평리)이 제주의 역사 문화가 묻어나는 정려문화공원으로 조성되길 기대해 본다.

▲효자 문달민과 문달복

대정읍 무릉2리 사거리 동쪽 신평 방향으로 난 지점에 문달민과 문달복의 정문(旌閭)이 있다. 대정 서면 출신인 문달민은 1851년 11월 아버지가 병으로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의 입에 넣었더니,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국가로부터 부역을 감면받고 효자의 완문(完文)을 받았다. 국가에서는 복호(復戶: 충신·효자·절부들에게 부역 또는 국가적 부담을 면제해주는 일)를 내리고 정려했다.

같은 자리에 있는 또 다른 정문은 문달민의 사촌 동생인 문달복의 기념물이다. 문달복의 어머니가 위독하자 사촌형처럼 손가락에 피를 내 어머니를 살리고, 철종의 왕릉 건설에도 참여하니, 주변에서는 충성스러운 마음씨를 칭찬했고 제주목에서는 자손에게까지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완문(完文)을 내렸다. 이 정문은 산방산 조면암으로 세워졌다. 다음은 1991년 서귀포시가 이곳에 세운 정려 내용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2리에 있는 효자 문달민과 문달복 정문.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2리에 있는 효자 문달민과 문달복 정문.

‘효자 문달민 정려: 효자 문달민의 본관은 남평이요 대정 서면 사람이다. 효심이 지극하고 행실이 남달리 뛰어나서 정성껏 부모를 봉양하였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부모님께 반드시 드리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여 드렸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존경하였다. 1851년(철종 2년) 11월 아버지가 신병이 갑자기 나서 점점 위급하여 지자 자귀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고 입에 넣었더니 사경에 이르렀으나 생명이 소생되어 전과 같이 건강을 찾게 되어 세인의 감동을 자아내었다. 여러 면 동임(洞任)이 보고를 본주(本州)에 올리니 목사와 판관이 그 효행을 높이 칭찬하고 표창제도에 따라 복호(復戶)를 하고 호역 면제증 완문(完文)을 내려 표창하였다. 이 정려는 1938년 3월 5일 세워져 오늘 그 효행을 밝히고 있으니 후세인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충효 문달복 정려: 공은 문달민의 사촌 동생이다. 성품이 순박하고 공손하였으며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갔으므로 어머니를 모시고 정성껏 봉양하던 중 어머니가 병이 나서 사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먹였더니 살아나게 되었다. 1854년 제주목사가 특별히 부역을 면제하여 표창하였다. 철종 인산(因山: 국장) 때에는 서울로 올라가서 도감청(都監廳)에 흑역사를 청하였으므로 그 충성스러운 마음씨를 칭찬하여 나라의 문충민(文忠民)이라고 하였으며 제주목에서 즉시 포상하였다. 아! 한 몸으로 이런 일을 겸하여 아름다운 일을 하게 되었으니 나라에까지 미쳐 효도가 충성으로 옮겨져 그 효행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므로 호역(戶役) 면제증 완문을 내려 표창하였다. 이 정려는 1938년 3월 5일 세워져 오늘 날도 그 효행을 밝히고 있으니 후세인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1991년 12월 서귀포시장’

▲박성림의 처 오씨 정려

문달민과 문달복의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평리 동남 방향 입구에는 또 하나의 매우 특색 있는 정려문이 있다. 천성이 어질고 착해 어려서부터 부녀자의 길을 곧게 걸은 오씨는, 박성림에게 시집을 가서 얼마 없어 남편이 죽자 음식을 전폐해 남편을 따라 죽고자 했으나 시부모가 말리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삭망에는 반드시 새 옷을 드리고, 자주 남편 묘소에 가니 눈물이 끊기지 않았다.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기어 마을 사람들이 효와 열이 온전한 것이라 하며 사림에 첨거하니 제주목사가 완문을 내렸고, 태극교 3강 풍화록에 오르고 1900년 쌀과 고기를 하사받는 은전을 입은 바 있어 이곳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제주 5호(虎)

제주에서는 선행과 공덕, 기행 등을 쌓은 선인들을 흠모하고 후세에 널리 알리려 3기(奇), 4절(絶), 4현(賢), 5현(賢) 등으로 이름 지어 전해오고 있다. 이에 더해 제주에서는 호랑의 형상을 한 다섯 사람을 제주 5호로 불렀다. 김용우(한동), 양정훈(명월), 부도일(거로), 신성흠(화북), 이최영(대정)을 제주 5호라고 칭했다.

의협인 또는 걸사(傑士)로 불렸던 이최영(1803~1884)은 대정향교의 대성전을 중건할 때 총감독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이최영은 또한 풍속을 바로 잡는 데 앞장서 여러 전설을 낳기도 했다. 대정현감을 찾아 선풍(仙風)으로 간했으며, 현감이 그를 바로 보면 그의 호안(虎眼)에 질려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제주시 화북동 거로 마을에서 태어난 부도일은 대정현감을 지낸 부종인의 당숙이기도 하다. 일찍이 귤림서원에 들어가 학업을 닦았으며 사람됨이 영특하고 풍모와 기개가 남달라 주위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명월만호를 지낸 양정훈은 됨됨이가 굳세고 걸출해 사람들이 호랑이 또는 양호(梁虎)라 불렀다. 1840년 영국 군함이 대정현 가파도에 나타나자 현감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했고, 정의현성 성첩과 문루 보수 감독과 제주성의 문루 보수 감독을 충실히 해 제주목사가 조정에 상신하기도 했다.

별방진 조방장과 명월만호 및 대정현감을 지낸 무신 신성흠은, 문신으로 정의현감과 대정현감을 지낸 신상흠(조천)의 사촌이다. 1860년 대정 서성 문루를 중건해 신성흠이 조정에 상신될 당시, 신성흠의 아들(신재팔)이 자기 누이를 강간한 노비를 잡아 들여 죽게 했다. 옥사가 이루어짐에 따라 제주목사 이복희가 뇌물을 바치지 아니한다고 해서 신재팔을 죽였는데, 신재팔의 부친인 신성흠이 1874년 신문고를 쳐서 원통함을 호소해 마침내 이복희 목사를 파직하게 했다.

무신인 김계무의 아들로 태어나 천총을 지낸 김용우는, 눈이 호안과 같다 해서 범천총이라 불렸으며, 훈련판관을 지냈다. 8척 장신이자 쌍공동(雙瞳孔)이어서 눈을 뜨면 마치 호랑이와 같이 무서워 나는 새도 떨어진다고 전한다. 제주목사가 김용우와 긴 대화를 나누다가 눈을 뜨자 기겁에 질렸다는 등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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