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3관왕 휩쓴 수작…길 위에서 행복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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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노매드랜드
남편과 터전 잃은 펀, 중고 밴에 가재 싣고 유랑 생활
고립감에서 벗어나 낯선 곳 달리는 인생에 점차 정착 

1997년 IMF 한파는 대한민국 많은 이들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엔 소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미국 경제를 강타했다. 오랜 기간 부동산 시장에 쌓여왔던 거품들이 사방에서 푹푹 꺼져갔다. 집을 담보로 은행에 빚을 낸 개인들은 여기저기 거리로 나앉아야 했다. 집값이 급락하면서 은행이 빚 대신 집을 회수해갔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파산도 줄을 이었다. 미국 중서부 탄광촌의 한 석고보드 회사도 그 여파를 피해갈 순 없었다.

‘2011년 1월 31일, 88년 역사의 ‘US석고’는 수요 감소를 버텨낼 수 없어서 네바다 주의 엠파이어 공장을 폐쇄했다. 7월에는 공장 지역 우편번호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이런 쓸쓸한 자막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황폐한 얼굴의 한 여인이 차 트렁크 박스 속에서 옷 한 벌을 꺼내들곤 가슴에 꼬옥 품는다. 그리곤 코를 들이박으며 숨을 크게 들이킨다. 남편이 입던 회사 근무복이고, 남편은 지금 이 세상에 없음을, 여인의 간절한 눈빛을 통해서 관객들은 직감한다.

그녀의 이름은 ‘펀(Fern)’, 60대 초반 나이에 남편을 잃었다. 자식도 없다. 그야말로 외톨이가 되었다. 젊은 날 석고 광산 회사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고, 이 지역 학교 보조교사로 또는 남편이 다니는 회사 인사과 직원으로 평생을 일하며 이곳서 살았다. 해발 1200m가 넘는 이 삭막한 광산촌을 한때는 떠나고도 싶었지만, 고아 출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혼자 남겨둘 수는 없었다.

엠파이어(Empire)는 ‘US석고’라는 1개 회사에만 경제를 의존하는 탄광촌이었지만,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때는 잘나가던 공업도시였다. 유일한 회사가 폐업하자 이젠 버려진 도시, 죽은 도시가 되었다. 그 와중에 남편이 암 선고까지 받아 투병하다 눈을 감아버렸다. 모두가 떠났지만 펀은 떠날 수 없었다. 죽은 남편을 홀로 남겨버린다는 느낌 때문이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이런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재를 처분하여 중고 밴(VAN) 한 대에 모든 살림을 옮겼다. 집 대신 그 속에서 먹고 자며 생활한다. 차를 몰아 주변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그때그때 일용직 ‘알바’를 뛰어 생활비를 충당한다. 새로운 삶의 목표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나이도 여건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낼 뿐이었다.

차 안에서 먹고 자고 용변까지 보지만 한적한 사막지대를 달릴 땐 잠시 차를 세워 숲속에서 바지를 내리고 앉아 일을 보기도 한다. 아마존 물류센터의 포장 알바, 식당이나 농장의 잡부 역할 등 구할 수 있는 일거리는 어디든 무엇이든 다 찾아 했다. 생활 보호 대상자로 신청하면 구호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마다했다. 스스로 일하며 자급자족하기를 택했다. 무기력하게 어딘가 누군가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자존감 있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거리 찾아 계절 따라 움직이는 티베트 유목민들처럼, 말 대신 차량과 함께 옮겨 다니는 노매드(nomad) 생활에 그녀는 점차 적응이 되어갔다. 평생 한 곳에서 일만 하느라 안 가본 낯선 길들을 마음놓고 달려보는 여행의 일상이 좋아졌다. 누군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집이 없느냐’고 물어오면, 자신은 ‘homeless’가 아니라 ‘houseless’일 뿐이라고 여유롭게 말해준다.

네바다 주를 벗어나 RV차량 노매드족들이 모여드는 아리조나 주의 한 커뮤니티 캠프행사에 참석하면서 펀은 같은 처지의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이들과 새롭게 교류하며 소통을 이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경제난에 따른 실직, 가족과의 이별이나 소통 단절, 또는 은행 빚에 집을 빼앗긴 경우 등 각자의 사연은 달랐지만 모두가 차량 한 대에 의지해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는 같은 처지들이다. 외롭고 가난하지만 밝은 표정을 잃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펀 자신도 비로소 그동안의 고립감에서 벗어나 노매드로서 제2의 인생에 정착이 되어가는 것이다.

다큐 형식으로 담담하게 이어지는 영화는 로드무비답게 미국 5개주를 넘나들며 북미대륙 서부와 중부의 풍광들을 장쾌하게 비춰준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 펀 부부의 삶의 터전이었던 네바다 주의 폐광촌 엠파이어다. 차량 속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었지만 죽은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이곳을 떠나지 못해 한동안 주변을 맴돌다 처음으로 네바다 주를 벗어난 건 아리조나 주의 쿼츠사이트(Quartzsite)로 가면서이다. 실존 유튜버 밥 웰스가 주최하는 RV 노매드 캠프행사인 RTR(Rubber Tramp Rendezvous)이 영화 속에 연출 없이 그대로 담기기도 한다.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무대는 중부 내륙으로 옮겨간다. 관객들은 영화 속 펀과 함께 사우스다코타 주의 배드랜즈(Badlands) 국립공원과 월(Wall) 마을과 니들스아이 터널(Needles Eye Tunnel) 그리고 네브라스카 주의 스코츠브러프(Scottsbluff) 지역 등을 여행하게 된다. 펀은 이곳들에서 식당이나 농장 일 또는 캠프호스트 일 등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함께 여행도 즐기며 나름대로 소중한 일상을 살아간다.

미국 중부를 관통하는 50번 국도(U.S. Route 50)는 우리나라의 50번 영동고속도로처럼 북미대륙을 동서로 횡단한다. 총거리 4,800㎞에 이르는 이 머나먼 거리 중 특히 네바다 구간 658㎞는 ‘미국에서 가장 외로운 도로(The Loneliest Road in America)’란 별칭으로 유명하다. 펀이 운전하는 차량 ‘선구자(Vanguard)’가 이 길을 달리는 정경은 아마도 관객들 뇌리에 영화의 대표 이미지로 오래 남을 것이다.

캠프에서 만났던 데이브의 초대를 받아 서부로 떠난 캘리포니아 여행에선 앤더슨 밸리의 핸디우즈(Hendy Woods) 주립공원의 거대한 나무숲 정경도 그려진다. 여러 여행지들의 풍광을 보여주는 화면들은 밝지도 않고 서정적이지도 않다. 웅장하지만 대체로 거칠고 칙칙하다. 하지만 내내 황량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펀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함께 정착해 살자는 데이브의 구애에 잠시 마음이 흔들리긴 하나 이른 새벽 펀은 조용히 차를 몰아 데이브를 떠난다.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위치한 포인트 아레나(Point Arena) 해변에 잠시 차를 세우고 걷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곧 폭풍우가 몰아칠 듯 거센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 절벽 위를 그녀는 더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걷는다. ‘그래 이런 게 나의 삶이야’라고 읊조리는 듯하다. 그리곤 하늘을 향해 심호흡 크게 하며 두 팔을 활짝 편다.

2021년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 두 곳 모두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받은 작품이다. 2020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들 중 최고작으로 입증된 것이다. 중국계 여성 감독 클로이 자이가 가장 주목받고 있지만, 이 영화의 주역은 단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3관왕의 프란시스 맥도맨드이다. 그녀는 이 작품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배우로서 그녀의 진가를 더 확인하려면 세 편의 이전 작품, ‘블러드 심플(1984년)’, ‘파고(1996년)’, ‘쓰리 빌보드(2017년)’를 이어서 보면 좋다.

영화 속 중요인물 밥 웰스(Bob Wells)는 구독자 50만을 보유한 실존 유튜버이다. 채널 ‘CheapRVliving’를 검색해 들어가면 영화 속과 똑같은 모습의 그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떠난 이들을 잊지 못하는 이들에겐 ‘기억되는 한 살아 있는 거다’라는 밥 웰스의 한 마디가 위안이 된다. 엔딩 자막이 끝나면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는 그의 한마디 ‘See you down the road’가 당신의 귓전을 맴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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