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수첩
해묵은 수첩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무료해 여기저기 뒤적이다 책상 서랍에서 수첩 하날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서른 해를 살던 읍내 집을 떠나오며 많은 것을 버리고 왔는데, 붙어 왔으니 예사 인연이 아니다. 금박이로 대입 종합반 現代學院이라 적혀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이라 했고 전화번호가 여럿 달려있어 학원 냄새가 난다. 내게 온 경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메모를 조금 하게 됐고, 주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게끔 칸칸이 나뉜 실용적인 수첩이다. 이삿짐을 싸며 오래된 거라서 버리기가 아쉬워 무의식중 속에다 쑤셔 넣었을 것이다.

제작연도가 나왔지 않아 정확지는 않으나 수중에 넣은 지 어림짐작으로 50년은 됐을 법하다. 대하고 보니 우선, 이런 수첩이 있었나 싶게 사뭇 낯설다. 서랍 속 비좁은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긴긴 잠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변변히 볕을 쬐거나 바람도 쐬지 못한 채 잔뜩 움츠려 견뎌내기 힘들었을 텐데, 잘도 참아 냈다.

가나다순으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넣고 있다. 젊은 시절, 활동 범주를 한창 넓히며 왕성하던 때라 쪽마다 빼곡히 채워 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올라있는 이름이 몇 백에 이를 것 같다. 동창생, 친구, 선후배, 친목, 동료, 동네 이웃, 외지인.

면면을 들여다보니 세상을 떠난 분도 수십 명에 이른다. 생존 시 나와 관계하던 분들이 유명을 달리했으니, 적힌 함자를 대하는 감회 유별하다. 수첩에 가둬 놓은 시간이 반세기니 하릴없는 일이다. 함자 앞에 붉은 글씨로 이라 적었어야 하는 데도 수첩은 침묵한 가운데 생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이전처럼 변함없이 묻어 놓은 채로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두 항공사 전화가 나와 있다. 항공 예약을 하기 위해 메모했겠는데, 어느새 격세지감이다. 요즈음은 핸드폰으로 해결하는 세상 아닌가. 항공권 매표소가 앞다퉈 문을 열던 것도 옛일이다.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며 서울에서 거처를 여러 번 옮겼던 큰아들 전화번호가 여럿 들어있다. 핸드폰이 나오기 아주 전이란 시점이 분명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수족관 전화가 나와 있어, 마루에 큼직한 수족관을 들였던 게 생각난다. 붕어와 열대어 여남은 마리를 키웠는데 생태를 꼼꼼히 챙기지 못해 몇 년 가지 않아 철거하고 말았다. 생명이란 다 그런 것이라 시종여일해 살피지 않으면 피차 정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몸집이 크고 알록달록 고운 빛깔로 치장해 무리를 이끌던 놈이 어느 날 물 위에 붕 떴지 않은가. 한마디 말이 없는 사별이 끔찍이 가슴을 우볐다. 잊고 있다가 되살아난 기억이다.

끄트머리 외사촌 동생의 전화번호에 눈이 머문다. 부산에 사는 그와 대화를 많이 해왔는데, 웬 연유인지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4형제 중 위로 형이 실종됐고 부산시 공무원이던 막내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집안이 겪은 일련의 풍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폰으로 안부를 전해오다 기별이 끊긴 지 오래됐다. 속절없는 게 인간사다.

위생운수 번호엔 야릇한 웃음이 난다. 대형차를 집 앞에 세워놓고 굵직한 호스를 화장실에 꽂아 배설물을 삽시에 수거했다. 이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몇 년 전 타계하신 장모님은 재일동포였는데, 딸을 키우지 못한 당신의 개인사를 무척 안타까워하던 일이 생각난다.

해묵은 수첩에 내 자취가 알 듯 말 듯, 아스라이 남아 있다. 이대로 품어야겠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