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백성 구제 위해 사재 기부…선정 베풀어 신뢰받아
(184) 백성 구제 위해 사재 기부…선정 베풀어 신뢰받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송달오, 서귀포 강습소서 야학생 가르쳐…항일 활동으로 옥고
 송두옥, 판관·군수·만호 등 역임…1898년 방성칠 난 진압 주도
 송두현, 광주서 학생 독립 운동…광복 후 제주법원 서기장 임명
 송방식, 초대 도의원에 최다 득표로 당선…제2대 도의회 부의장
송두옥은 1898년 방성칠의 난이 일어나자 토착 세력들을 모아 민란을 진압했다. 사진은 2002년 복원된 제주목 관아 전경으로 방성칠 등은 가혹한 징수에 반발해 제주목 관아를 비롯한 제주성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송두옥은 1898년 방성칠의 난이 일어나자 토착 세력들을 모아 민란을 진압했다. 사진은 2002년 복원된 제주목 관아 전경으로 방성칠 등은 가혹한 징수에 반발해 제주목 관아를 비롯한 제주성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송달오宋達五:1910(융희4)~1950(분단시대), ‘서귀포 야학강습소’에서 항일 운동. 

1934년부터 야학생에게 글을 가르쳐 문제됐다. 이도백(李道伯) 등의 지도 교양을 받아서 ‘프롤레타리아 경제학’ 등 사회과학에 관한 책을 탐독, 공산주의에 공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결혼 피로연에 초대되자 이전춘(李全春) 외 수십 명에게 “이도백은 사회주의자라 하지만 실제는 자본주의자다. 해녀·어민의 고혈을 착취, 결혼식을 거행하니 모름지기 착취한 돈을 무산자에게 돌려라.”라고 선동했다. 또 동지들과 반전론(反戰論)을 역설하고 조선인을 차별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본관은 여산, 송봉주(宋奉株)의 차남으로 산남 서귀리(서귀포) 454번지에서 태어났다. 1931년 3월 서귀공립보통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동년 4월 상경해 경성고학당(京城苦學堂)에 입학했다.

곧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시 동아고무공장 직공으로 일하던 중 귀향했다. 이 일로 전남경찰부 노경부(盧警部)의 지시를 받은 제주경찰서은 1935년 8월 18일 서귀포를 중심으로  송순혁(宋純赫) 외 40여 명을 검거한 후 3개월 동안 심한 조사를 했다. 1937년 6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1950년 7월 18일 사망했다.

▲송두옥宋斗玉:1850(철종1)~1922(일제강점기), 항일 활동, 무신, 제주판관·정의·대정 양군(兩郡)의 군수 역임, 호는 귤헌(橘軒), 본관은 여산.

‘제주-성안’에서 송신(宋藎)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호남의 부자들과 어깨를 견줄 만하다고 일컬어졌다. 

1892년(고종29) 7월 제주판관에 도임하고 동년 9월에 떠났다. 1893년 5월 하흥도(河興道)의 후임으로 대정군수에 부임, 1894년 2월에 떠났다. 

귤헌은 일찍이 형의 뒤를 이어 무과에 급제하고 친형 위죽당(爲竹堂) 송지옥(宋之玉)과 함께 해산물상(海産物商)을 운영, 18척의 대선단(大船團)으로 어물을 육지부로 교역해 당대 최고 부호가 됐다. 현 오현단 앞과 관덕로(觀德路) 근처 일대의 중요 지점은 거의 그의 소유였다고 할 정도였다.

귤헌 송두옥은 1890년 명월만호에 임명됐으나 동년 병으로 그만뒀다. 짧은 기간 재임하면서 늠료(凜料)를 내놓아 백성을 구휼하고 폐단을 개혁했고 백성들이 ‘읍후(邑侯) 송두옥 선정비’를 산남 신효동과 토평동에 각각 세웠다. 

재임 중인 1893년 가을 기근이 있었으며 익년 봄에 쌀 100석을 희사해 기민을 진휼(賑恤)하고 또 대정항교를 보수했다. 이어 마종문(馬鍾文)의 후임으로 정의군수에 도임했으나 부임 및 퇴임 연월일은 알 수가 없다.

1894년(고종31)는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의연금을 내놓았다. 조정에서는 송두옥에게 통정대부(정3품) 이상의 벼슬을 내렸다.

이 무렵 전라남도 동복(同福)군 출신인 방성칠(房星七·1849~1898)은 제주에 들어와 강벽곡(姜辟穀), 정세마(鄭洗馬), 팔십노동(八十老童) 등 기인들에 의해 민란의 장두로 추대됐다. 방성칠은 1898년(광무2) 1월에 섬 밖에서 들어온 남학당(南學党) 세력과 일부 유배인, 대정군 지방의 화전민을 규합, 정감록(鄭鑑錄)의 참언을 믿어 유배를 온 정병조(鄭丙朝)를 주체로 삼아 제주를 독립시키거나 아니면 자원해 일본에 복속시킬 계획을 꾸몄다. 

이에 송두옥은 아들 석진(錫珍)을 움직여 홍재진(洪在晋), 김응빈(金膺斌) 등 전직 지방 수령들과 또 무과 출신 송윤옥(宋允玉), 김남윤(金南胤) 등을 모아 창의소를 마련해 근왕병을 일으켰다. 

이 민란이 있은 지 3년 뒤인 1901년 이재수(李在守)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때 민군(民軍)의 표적은 송두옥, 김응빈, 홍재진 등이었다. 방성칠 난 때 창의병을 일으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송두옥, 홍재진은 미리 목포로 피신하고 소요가 진압돼 다시 돌아왔다. 

귤헌의 아들 송석진은 방성칠 난을 진압한 공로로 1898년 7월 제주목 주사로, 1902년(광무6) 8월 제주군수로 승진했다. 그러나 동년 11월 8일 현직에서 병사했다. 귤헌은 성 밖의 집 한 채와 그 부지를 사서 아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집 주인과 그 마을에까지 넉넉하게 보상금을 주니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이는 귤헌의 인격과 학식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귤헌은 1922년 73세로 타계했다.

▲송두현宋斗鉉:1911(일제강점기)~1948(미군정기), 광주 학생 운동 당시 광주농업학교 학생의 항일 활동, 광복 후에 제주지방법원 서기장, 본관은 여산.

송창기(宋昌璣)의 장남으로 애월읍 금성리 (모실-개)에서 태어났다. 한학자 일헌(一軒) 장성흠(張聖欽)의 외손이다. 1929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 3년을 졸업하고 이어 광주공립농업학교 제4학년에 편입, 광주 명치정 5정목 49번지 정치운(鄭致雲) 댁에서 동기생 홍원표(洪元杓·귀덕)와 함께 하숙, 1929년 11월 3일의 광주의 항일 학생 운동 이후 체포됐다. 이로써 퇴학을 당하고, 1931년 6월 13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고 1946년 5월 28일에 제주지방법원 서기장(書記長)에 임명됐다.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의 항일 학생 운동을 인정해 모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이때 1948년 4·3사건이 일어나 미증유의 살상이 발생, 무법이 횡행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해 11월 토벌대는 읍내 유지 다수를 제9연대 본부가 있는 제주농업학교 구내에 감금했다. 제주지방법원에도 법원장 최원순(崔元淳), 검사시보 김방순(金邦順·곽지), 법원사무장 송두현(宋斗鉉)과 법원 직원 김진영, 양성두, 홍인표 등이 감금됐다. 이후 최원순은 석방됐고 김(金)과 송(宋)은 동년 12월 12일 사라봉에서 변고사(變故死)를 당했다. 

김방순과 일본 리츠메이캉(立命館) 대학 동창인 강순현(姜淳現·납읍)의 증언 기록을 보면 이는 서북청년단 단원에 의해 꾸며진 사태라고 했다. 

 

 

▲송방식宋邦植:1915(일제강점기)~?, 사업가, 전 제주도의회 부의장, 여산송씨 정가공파. 

애월읍 하귀리에서 태어나 젖먹이로 1916년 부친 송권은(宋權殷·사업가)을 따라 표선면 표선리(당캐) 666번지에 정착, 정의보통학교를 거쳐 도일(渡日), 교토(京都)의 동산중학교 5년을 졸업했다.

해방 이후 부친이 창업한 양조장(釀造場) 공장을 운영해 11년이나 했다. 표선면장을 거쳐 제주도교육위 부의장, 초대 도의원에 당선, 이어 제2대 도의원에 무투표 당선, 도의회 부의장에 당선됐다. 

앞서 1947년 4월 26일 오후 5시에 표선면 독립촉성청년회를 결성해 위원장에 선출됐다. 이로써 20명의 도의원 가운데 애월면 출신 도의원은 김영희(金瀛熙·애월), 김선희(金瑄熙·애월), 장용직(張龍職·곽지)과 함께 4명이 돼 타 읍면보다 가장 많았다. 

초대 도의원 남제주군 선거구 7명 당선자 가운데 최고 득표자였다. 제주도적십자사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