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도지사 업무를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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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 제주대학 국립 승격, 박정희 의장께 제1순위 건의 정리"
허벅 이용한 식수 해결, 묘안 찾기 고민
감귤, 전국민 즐겨 먹는 과일로 생산 장려
항공 노선 확충·여객선 규모 증설 역점

▲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있는 김영관 제주도지사.
나는 제주도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고 지사로 업무를 파악하면서 제주도 생활에 적응해 갔지만 내 가족들은 달랐다.

 

내 아내는 나를 따라 왔지만 말로만 듣던 제주도에 생전 처음 온 것이고 제주도 하면 한라산 정도 알았지 모든 것이 전혀 생소한 상황이었다.

 

다만 내 아이들은 제주도에 관심이 컸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데다가 도지사 관사에 들어가고, 생소한 제주도 사투리 하며 아마 이국땅에 들어온 기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둘째 딸은 1학년으로 제주북교에 전학했는데 선생님이 많은 도움을 주셔서 아이들은 재미있게 학교를 다녔다. 학교시설도 서울의 다른 학교에 뒤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나와 내 가족이 살게 된 제주도지사 관사가 앞으로 제주개발에 도움을 줄 육지의 실력자들과 교류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한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내 아내도 도지사 관사에서 펼쳐질 제주도 개발의 과정에 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을 몰랐음은 물론이다.

 

다음날 도지사 업무를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제주도의 현황과 문제점 등 업무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도청에서 업무를 보고받았는데 제주시는 딱 머릿속으로 들어왔지만 남제주군이 어떻고 북제주군이 어떻고 아무리 말을 해도 머릿속으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읍면은 더욱 그랬다. 읍면사무소는 나중에 다 돌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어디가 어딘 지 정리가 되지 않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 익숙한 함대사령부 제주기지, 포항기지, 인천기지 하면 딱 감이 왔지만 한경면이다 애월면이다 하는데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읍면장과 지역을 바꿔서 생각하기도 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도정업무 보고를 받은 것을 토대로 나름대로 제주도의 문제를 정리하고 이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도정을 운영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첫 번째가 물 문제였다. 강원도 출신인 나로서는 물이 없어서 빗물을 받아먹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산이 깊은 강원도의 계곡에 물이 넘쳐 물을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마을의 아낙네들이 허벅을 이용해 하루 종일 먹을 물을 뜨러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 때는 제주도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뚜렷한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둘째는 감귤산업을 육성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대구하면 사과가 떠오르고 전 국민이 즐겨 찾아 먹을 수 있는데 반해 감귤은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데 전 국민이 먹을 수 없는 희귀과일이었다.

 

전 국민이 사과를 먹듯이 제주도의 감귤을 전 국민이 먹을 수 있도록 감귤 생산을 장려하고 생산량을 늘려야 제주도 농민들의 소득도 자연히 올라가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셋째는 육지와 제주도간 불편한 교통문제였다.

 

서울-제주간 비행기 노선을 확충하고 제주-목포, 제주-부산간 여객선의 규모를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주도는 육지로부터 소외된 낙후한 섬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제주도가 육지와의 불편한 교통 때문에 온 국민이 모두 누려야할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제주도민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제주도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제주도와 육지간에 안전한 연계교통수단이 있어야 육지에서 제주도로 사람들이 쉽게 오고 제주사람도 안전하게 육지로 갈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 50년전인 1961년 제주도청(현 제주시청 건물)은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네오고딕 양식을 바탕으로 근대건축양식의 특성을 잘 반영한 대표적 근대건축물로 꼽힌다.

넷째는 한라산이었다.

 

금강산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한라산은 제주도에 대한 접근성 문제로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산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하늘에서 본 한라산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한라산을 이용해 제주도의 가치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볼때 제주도는 부동(不動)의 항공모함으로 보였다. 한라산은 항공모함의 돛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한민국을 인도하는 상징적인 곳이 바로 제주도이고 한라산이라고 여겼다.

 

다섯째는 재일교포들을 최대한 제주개발에 참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읍면지역을 순회하면서 보니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이 해방이후 자기들의 고향발전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도로를 만들고 마을의 발전 기반시설을 갖추는데 이미 많은 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사실이 마을 자랑이었고 발전을 북돋우는 힘이었다.

 

내가 볼 때 이같은 그들의 애향심은 어디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들의 애향심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 제주도민이 제주도를 사랑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촉매제였다.

 

재일교포들이 제주발전을 위한 사업에 투자하면 교포들도 좋고 제주도에도 좋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판단이 들었다.

 

실제로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은 고향 제주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제주개발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여섯째는 제주대학 문제였다. 제주대학은 당시 도립대학으로 제주도로부터 지원은 제로상태였다.

 

나는 제주발전을 위해선 제주대학이 인재를 길러 제주개발의 주역이 되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제주대학의 비전을 세우는데 고심했다.

 

제주의 인재들이 육지의 대학으로 떠나면서 우수한 인재들이 빠져나가고 그에 따른 학비 등 경제적 비용도 유출되는 이중의 손해를 보는 셈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도립 제주대학을 국립 제주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일에 우선 매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혁명정부 문교부장관이 해병대 대령인 문희석 이었던 점도 도립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승격시킬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큐슈대학은 비록 섬에 있지만 일본 내에서도 특성화된 교육으로 유명한 대학이고 홋카이도의 수산대학은 일본내 최고의 대학으로 일본 각지의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고 있었다.

 

제주대학도 농업과 수산분야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마지막으로 제주도는 비슷한 여건인 홍콩과 하와이 같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내 나름의 비전을 마음속에 심었다.

 

그리고 이같은 나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공·사석에서 자주 강조하고 다녔다.

 

나는 이같은 제주개발에 대한 구상을 하면서 제주계엄사무소 민사처에 접수된 민원을 파악하고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지역주민들의 불만과 불편사항이 무엇인지 살폈다.

 

그중 내가 기억 하는 것은 마을 경계에 새로 들어선 교량의 이름을 놓고 두 마을간 자존심을 건 분쟁이 발생해 해결한 일이다.

 

성산면과 표선면의 경계선에 위치한 교량의 이름을 놓고 신천리와 하천리 주민들간 다툼이 있었는데 내가 중재에 나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라는 뜻으로 다리 이름을 평화교로 결정하면서 두 마을간 다툼은 끝났다.

 

또 다른 것은 지역 이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꽤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채 갈등상태로 남아 있다가 내가 도지사로 부임하자 또 다시 불거진 문제였다.

 

한국전쟁 당시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서면서 군용차량전용도로(일명 신도로)가 개설됐는데 훈련소 철수 후 이 도로로 일반 여객차량이 통과하면서 상권이 형성됐다.

 

이 때문에 구 도로에서 영업하던 주민들이 경제적 타격을 받자 반발해 도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여객자동차들의 신도로 통행제한을 요구하면서 집단분쟁으로 비화됐었다.

 

현지 주민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실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구도로는 현재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인데도 일부 주민들이 자기들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신도로에 여객자동차가 즉각 운행할 수 있도록 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해 오랫동안 끌어왔던 마을분쟁을 종식시켰다.

 

그 때가 읍면지역 첫 시찰을 이틀 앞둔 6월5일이었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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