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혁명정부 3명의 장관 첫 제주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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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 주재 최고회의서 시내 간선도로 포장 결의
도민여론조사결과 혁명정부 호감도 꽤 높아
물.교통.산업.관광 등 현안 최고회의서 공감
전국 지방장관회의에 참석하고 제주로 돌아온 나는 혁명 후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범정부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재건국민운동본부 제주도지부를 조직했다.

1961년 6월17일 발족한 재건국민운동본부 제주도지부는 박경철 제주계엄사무소장과 제주도지사인 내가 당연직 지부장으로 구성돼 공동체제로 운영됐다.

국민들의 해이해진 정신을 관과 군의 주도로 바로 잡아나가겠다는 것이 재건국민운동의 설치목적이었다.

첫 사업은 제주신보(제주일보의 전신)와 제주방송국의 후원으로 실시한 도민여론조사였다. 5.16이후 1달여 만인 6월 26일과 27일 2일간 도내 거주 537명을 대상으로 군사정부에 대한 도민여론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사는 정부시책, 깡패처벌, 정당 사회단체 해체 등 혁명정부에 대한 민심을 살펴보기 위한 3개 항목으로 이뤄졌다.

조사결과 정부시책에 대해 썩 잘했다(48.9%)와 대체로 잘했다(42.2%)에 90%이상 응답해 도민들 사이에 혁명정부에 호감도가 아주 높았다.

또 깡패처벌에 대해 썩 잘했다(88.8%)와 대체로 잘했다(9%)에 역시 90% 이상 지지했으며, 정당사회단체해체에서 썩 잘했다(42.8%)와 대체로 잘했다(28.3%)에 70%의 지지를 나타내 혁명정부 초기 도정을 풀어가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이같은 도민 호응에 힘입어 7월3일 관덕정 광장에서 주민, 공무원, 학생 2만 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운동촉진대회 개최하고 5.16을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 퇴폐한 국민도의를 재건해 명랑한 복지사회를 건설하자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재건국민운동본부 제주도지부에서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이 행사에 모시려고 했으나 최고회의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혁명정부에서 역점을 기울여 추진했던 일들 중 공무원 부정부패나 깡패, 농어촌 고리채 등 다른 지방과 달리 제주도에서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에 앞서 서울에서 열린 첫 지방장관회의에서 내가 요구했던 제주시내 간선도로포장문제는 최고회의에서 결의됨에 따라 나는 제주도민들에게 올해 안에 제주시 중심도로가 포장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할수 있었다.

또 내가 브리핑했던 제주도의 물 문제, 도로문제, 육지와의 교통문제, 제주도의 산업진흥문제, 관광산업진흥문제, 4.3이재민 원주지복구문제 등 제주도의 현안에 대해 혁명정부의 각 부처 장관과 최고회의에서 공감을 얻어내는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이어 6월22일 한신 내무장관, 장경순 농림부장관, 장덕승 보사부장관이 제주도를 찾았다.

5.16이후 혁명정부가 수립된 지 한 달여 만에 처음으로 장관 3명이 국정 수행의 바쁜 와중에 한꺼번에 제주도를 찾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는 장관일행을 맞이하면서 내가 구상했던 제주개발계획을 만드는 것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정부 수립이후 제주도 지역 단위의 연차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전라남도에 속한 제주섬에서 제주도(濟州道)로 분리 독립되고,4.3사건, 정부수립, 이어진 전쟁, 4.19 등을 거치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까닭에 제주도 단위의 종합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기에는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출범과 성격에 맞춰 제주도 차원에서 개발과 발전을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과감하게 제주도개발계획을 만들어갔다.

나는 제주도 개발계획을 통해 ‘길의 혁명’과 ‘물의 혁명’에 이어 제주도를 널리 알려 홍콩과 하와이 같은 국제적인 관광의 메카이자 자유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나는 서울 출장시 중앙언론사를 방문해 제주도에 관심과 성원을 부탁했고 제주도를 널리 알려달라고 호소하고 다녔다.

전도를 순회하는 읍면 초도순시에서 대부분 중산간 마을이 주민들이 빗물을 받아다가 식수로 사용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충격이었다.

또 제주도내 도로가 전부 비포장이라는 점도 안타까웠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에는 길과 물의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나는 제주시내도로 포장과 함께 한라산 횡단도로와 일주도로 포장계획수립을 지시했다.

내가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의지를 가진 것은 일주도로는 언제든지 포장이 가능하지만 횡단도로는 현재의 여건상 혁명정부 아니면 쉽게 추진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라산을 관통하는 횡단도로는 경제적 파급효과는 물론이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제주시내의 도로도 단 1m의 포장도로가 없는 상황에서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니까 제주도 공무원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도내 공무원 입장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도지사인 내가 하라고 하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라산 횡단도로포장이 어렵다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과 도민들 사이에서 한라산 횡단도로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나를 보고 무대뽀(?) 도지사라고 불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같은 나의 생각은 또 중앙정부와 협의과정에서 큰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6월22일 오전 10시 특별기편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장관일행은 이헌경 내무부 도로과장, 김보현 내무부 재정과장, 수리조합연합회 허순오 대령, 오병익 농지관리국 이사관, USOM(미국대외원조처) 관계직원 15명 대동했다.

내가 공항에 직접 나가 영접했고 바로 도지사실로 안내해 그동안 준비한 횡단도로와 일주도로에 대한 대단위 포장사업 등 제주도 개발 계획을 차례로 풀어놓았다.

다행히도 한신 장관은 나하고는 국방대학원 동기생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한신 내무부장관은 청렴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한평생 군 발전에 헌신해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온 참 군인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 출신이면서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임관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진의 발판이 된 낙동강 교두보 확보를 위한 경상북도 안강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전투로 방어에는 한신을 당할 인물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5·16 당시 나처럼 모의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박정희 장군의 권유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의원을 맡은데 이어 군정 기간에 내무부장관과 감사원장을 지냈고, 민정 이양 후 군에 복귀해 군단장·군사령관, 합참의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다.

박정희 장군과 한신 장군은 군인으로서 여러 면에서 많이 닮았고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수도사단장·훈련소장·6군단장·전투병과 사령관 등으로 재임했을 때 각 부대별로 간부교육대를 만들고 혹독한 교육훈련을 시켜, '한신대학'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이런 한신 장군이 혁명정부 초대 내무부장관이 됐다는 것이 너무도 반가웠고 정부 차원에서도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장경순 농림부장관은 군인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제6,7,8,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 상해에서 해방을 맞은 뒤 광복군에 투신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잠시 교편생활을 한뒤 육군에 투신해 준장이 됐다.

민정 이양 후에는 공화당에 입당하여, 이후 전북김제를 지역구로 제 6대부터 10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신군부가 들어서자 정계를 은퇴했다.

장덕승 보사부장관은 공군병원장출신으로 우리나라 항공의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군사정변후 보사부장관에 임명됐으나 한 달 보름 만에 경질됐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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