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혁명정부 3명의 장관 제주 첫 방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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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 앞에서 도로사업 놓고 내무부와 타당성 설전
정부 지원 얻기위해 지속적으로 관료들 설득
한신 장관 “내무부가 제주 발전 지원 하겠다”
제주항-관덕정 잇는 제주 시내도로 첫 포장
▲ 김영관 제주지사 등이 한라산 횡단도로를 비롯한 도로개발사업 본격시행에 앞서 사업대상부지 현장을 찾아 점검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필자(정 중앙)가 5·16도로 개설포장에 앞서 현장 상황을 파악중인 모습.

■ 한신 장관의 적극적 지원
내가 제주도를 방문한 3명의 장관들에게 제주도 개발계획에 대해 브리핑한 것 가운데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사업은 주요 화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사업이 제주도 전체적인 경제적 파급효과와 남북의 균형발전은 물론이고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큰 볼거리가 되고 제주도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것으로 확신했다.

 

한신 장관은 나의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구상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라고 찬성을 표시한데 비해 한신 장관을 수행한 이헌경 도로과장과 김보현 재정과장은 도로개발 규정을 들며 횡단도로 포장사업이 어렵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국내도로포장전문가로 자타가 인정하는 이 과장은 나의 브리핑이 끝나자 한신 장관이 찬성을 표시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대는 하지 못했지만 예산문제를 들어 정부 지원이 어려울 것이라고 우회적이고 기술적으로 반대했다.

 

제주도는 도로포장을 한일도 없는데 어렵지 않겠느냐는 원론적인 얘기였다.

 

이처럼 중앙정부 관료들은 근본적으로 제주도개발에 관심 자체가 없었고 도로포장문제는 더더욱 그랬다.

 

이후 나는 내무부 도로과장과 한라산 횡단도로포장사업을 놓고 박정희 의장 앞에서 열띤 설전을 벌이게 된다.

 

나는 구체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선 관료들을 충분히 설득해야하는 과제가 크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됐다.

 

이로써 횡단도로와 일주도로 포장계획은 나의 의지로 조금씩이나마 진행할 수 있었으나 중앙정부와 힘겨운 절충은 여전한 난제였다.

 

▲ 김영관지사는 1961년 당시 제주도에 대한 혁명 정부의 관심속에 개인적 친분이 있는 한신장군이 내무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도로 등 제주 개발관련 중앙예산지원이 크게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보는 1961년 8월28일자 3면에 개발관련 중앙예산 지원 규모를 상세히 보도했다.
■ 중앙언론사들도 입장지지
내무부 관료들은 서울로 돌아가서도 제주도 횡단도로포장사업은 안되는 일이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다만 송요찬 내각수반을 비롯한 혁명정부 장관들과 최고위원들은 제주도의 개발에 대해 모두가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나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또 서울출장시 나는 반드시 중앙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제주도를 도와달라고 요청하곤 했는데 모두가 내 입장을 지지해주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추진하려는 제주도 개발계획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제주도 개발에 대한 분위기 조성이 전혀 되지 않았고 서울에 있는 의사결정권자들도 제주도를 한 번도 다녀와 보지 못해 제주도를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나는 제주도를 방문한 장관들로부터 선물을 받아내야 했다.

 

우선 최고회의에서 결의했던 것처럼 연내에 우선 제주시 제주항에서 한천교 사이의 간선도로 포장비 7000만환과 도립병원 보수비 1000만환을 지원해주겠다는 약속 받아냈다.

 

또 수해이재민 및 영세민 구호곡으로 책정된 전국 6290석 가운데 제주도에 100석을 할당받기도 했다.

 

아울러 4·3사건 이재민 원주지 복구사업의 연차추진과 이를 위한 영농자금 등 예산지원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냈다.

 

■ 박정희 의장의 특별지시
이 모든 것은 이미 내가 박정희 의장에게 보고하고 박 의장이 적극적인 지원을 각 부처 장관에게 지시했던 일이기도 했다.

 

또 3부장관이 제주도를 처음 방문하면서 물과 도로의 문제 등 제주도의 실정이 중앙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혁명정부의 장관들도 제주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한신 장관은 내무부 장관으로서 제주도 개발과 발전방향에 100%공감했고 내가 제시한 것을 전적으로 지원하고 적극 협력함으로써 다른 부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신 장관은 나와의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지만 제주도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컸다.

 

군인중 군인이었던 한신 장관은 군인으로서 4·3사건을 겪은 제주도민들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제주의 실정과 제주발전계획을 설명하면 그는 ‘제주도가 낙후됐다. 뒤떨어졌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내무행정 차원에서 들여다 보니까 제주도 상황이 너무 절실히 느껴져서 내무부에서 도울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돕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줬다.

 

나로서는 한신 장관이 내무부장관이 된 것이 개인적으로 참 좋았고 제주도로서 다행스런 일이었다.

 

■ 도로 포장 후 여성 옷차림 변화
이때 확보한 예산으로 제주항-동문통-칠성통-남문통-관덕정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포장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도로가 포장되니까 제주여성들의 신발과 옷차림새까지 달라졌다.

 

나는 특히 제주시 칠성통을 서울의 명동처럼 특별히 생각해 가장 먼저 포장했는데 포장도로가 없을 때에는 하이힐을 신을 수 없었던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구두방을 중심으로 돌기도 했다.

 

또 도로포장의 스토리는 그 이후 제주에서 처음 열린 탐라미인대회로 연결되기도 했다.

 

8월 12일에는 칠성통에 1000석 규모의 제일극장이 개관됐는데 나는 주말마다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자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었다.

 

주말마다 가족들과 이곳을 찾으니까 도지사가 자주 온다는 소문이 나기까지 할 정도였다.

 

나는 칠성통으로 아들 딸을 데리고 가서 제과점에 들려 간식을 사주기도 하고 도민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즐겨했다.

 

도지사라는 입장은 내가 기독교 신앙 생활도 조심스러울 밖에 없어 한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여러 교회를 다녀야 했다.

 

또 그해 8월 여름 어느 날(22일)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는 한국과 일본의 해안경계선인 평화선을 침범해 불법 어로를 하던 일본 어선이 우리 해군경비정에 나포돼 산지항에 예인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어선이 평화선 침범은 501016 이후 군정이 실시된 이후에는 많이 없어졌지만 간혹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래선지 내가 이후 도지사로 일본초청으로 일본에 방문했을 때 일본 수산업계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일본 방문을 환영한다면서 일본 어선이 잘못하더라도 잘 좀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내가 해군 제독이고 제주도지사라는 것을 파악해 일본 자기나라의 수산업계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 나서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었다.

 

8월말에는 제주출신인 김영길씨가 제주지방법원장으로 발령받아 제주도지사 집무실로 인사을 하러 와서 처음 만났다.

 

그 분은 법원장으로서가 아니라 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를 격려하고 제주도를 위해 수고를 해줘야겠다고 나에게 당부했었다.

 

이후 나는 그 분과 제주발전과 개발방향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누며 교류했는데 나하고는 김해 김씨로 본이 같고 같은 영자 항렬을 쓰고 있어서 더 친숙하게 지내서 정말 잊을 수 없는 분들 중 한 분으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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