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제주대가 국립대로 승격되다 ②
8.제주대가 국립대로 승격되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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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국립 승격은 박정희 의장 의지와 도민 여론 덕분”
“해방 이후 장면 내각까지 수차례 국립승격 건의 불구
국무회의 등 마지막 단계에서 번번히 부결 결정…”
“박정희 의장은 제주대를 국립으로 승격

■ 발전 토대 갖춰가는 제주대
내가 제주대학을 도립에서 국립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했다는 문교부의 공문을 받은 때는 1961년 9월 1일이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전국 시·도 초도순시에서 가장 먼저 제주도를 방문하기 바로 1주일 전이었다.

 

이후 문교부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제주도와 제주대의 육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고 본격적인 육성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청 교육과장이었던 양치종씨가 내게 문교부로부터 제주대학에 새로운 학생정원을 배정하고 가정학과 등 새로운 과를 신설했다는 보고를 했다.(국문과 60명, 영문과 40명, 법학과 60명, 가정학과 60명, 농학과 120명, 상학과 60명, 축산과 100명으로 조정)

 

또 제주사범학교를 대학 2년 과정으로 개편해 제주대 교육과로 신설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제주도의 지역균형발전과 서귀포 주민들의 열망을 반영해 서귀포 지역주민들이 모금한 자금으로 2만평을 확보한데 이어 문교부의 지원으로 이듬해 제주대 농과대학부지 7만7562평을 마련하는 등 국립 제주대학의 면모를 서서히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때 마련한 서귀포 부지는 내가 도지사를 마치고 군으로 원대 복귀한 1964년 이농학부 캠퍼스로 활용됐다.

 

■ 문희석 장관의 지원
어쨌든 제주대학은 초급대학을 인가 받은 지 10년 만에 도립에서 국립으로 승격되고 법문학부와 이농학부 2개의 학부로 개편된 4년제 대학으로 거듭나게 됐다.

 

당시 혁명정부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문희석 장관은 제주대학을 국립으로 이관시키는 선물을 제주도민들에게 주고는 1962년 1월초 짧은 7개월여 간의 장관직을 마치고 해병대로 원대 복귀해 제2훈련단장을 지냈다.

 

그는 일본 동지사대학교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중앙대 조교수, 국방대학원 교수를 역임한 학자이자 군인이었는데 이후 건국대 총장을 지냈다.

 

특히 그는 문교부장관 재임동안 교육자의 퇴직 후 생계보장제도가 취약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이후 현재의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여의도회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내가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기 전 부터 도민들은 초급대학으로 인가받은 이후 국립으로 이관돼야 정상적인 대학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줄기차게 중앙정부에 승격을 요구했었다는 것을 양치종 교육과장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 이전 정부는 ‘국립 승격 불가’
6·25 전쟁직후인 1953년 8월부터 제주대 국립승격 진성서를 문교부에 수차례 제출했으나 거절당했고 그 다음해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국립대 승격을 위해 중앙절충을 시도한 결과 1954년 말 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는데 까지 성공했고 문교부도 국립대 승격을 전제로 사업을 추진했으나 또 다시 국무회의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그 때 당시 국립대 승격 추진은 제주초급대후원회가 중심이 돼서 했는데 이윤희 회장, 양홍기·김범준 부회장, 조순하·김계용·고담용·부항석·조재수 이사들이 주요 인사였다.

 

이에 앞서 4·19혁명이후 장면총리가 초도순시차 제주도에 와서 제주대학을 방문하자 국립대 승격을 또다시 요청했지만 국립이관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은 내가 도지사로 부임해 제주대의 국립대학 승격을 추진하기 이전부터 꾸준하게 국립대 승격을 추진해왔고 그 열정의 결과가 혁명정부에 와서 결실을 맺은 셈이다.

 

제주대 국립이관의 잔심감과 확신이 필요했다

 

제주대 국립승격이 이처럼 어려웠음에도 내가 확신을 갖고 중앙정부와 협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양치종 교육과장과 문종철 학장의 열성과 제주신문을 비롯한 언론사, 도민여론의 뜨거운 지지 때문이었다.

 

■ 언론·도민 지지도 한몫
나는 처음 양치종 교육과장을 단순한 공무원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진정한 교육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더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제주대학이 국립으로 이관되는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10년간 추진해도 안됐던 일인데 무턱대고 정부에 건의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내가 확신과 자신감이 없었으면 추진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제주도개발에 대한 계획을 세워서 도로, 물, 농수축산, 관광산업 육성의 필요성을 중앙부처에 건의하고 공감대를 만든 후 이를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를 연계시켜나갔다.

 

제주개발의 주체인 인재를 키우기 위해선 제주도에 반드시 국립 제주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제주대학의 국립이관을 요청하는 건의서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주대가 우리나라에서 특수 실업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과 국립이관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내 고교졸업예정자 가운데 50%가까지 각급 대학교로 진학하는 놀라운 진학률을 보이고 있었으나 안타까운 것은 이같은 도민들의 교육열을 뒷받침할 경제력은 이에 못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도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높은 교육열을 제주발전에 연결시키기 위해서도 제대로된 대학이 제주도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건의서에서 강조했다.

 

또 제주도의 너른 중산간 초지대는 목축업의 발전을 위한 토대가 되고 4면의 바다의 어장을 개발하고 일본의 어장침범에 적극 대응할 수산인 양성, 온난한 기후를 이용한 특화된 농업, 천혜의 자연관광을 이용한 관광산업은 제주도만이 가능한 분야라고 설명했다.

 

내가 이처럼 접근해서 그런지 중앙부처에서는 뜻밖에도 제주대 국립전환에 대해 당연히 이뤄져야 할 일로 받아들였고 벌써 이뤄졌어야 할 문제로 여기는 반응이었다.

 

여기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제주대학을 국립으로 승격시켜야겠다는 확고한 결심과 의지가 있었기에 모두가 가능한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어떻게 보면 5·16은 제주대학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제주대 발전에 결정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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