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제주도 단합을 위한 문화행정①
24. 제주도 단합을 위한 문화행정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한라의 장한기상 바다로 뻗고”‘제주도의 노래’탄생
1962년 제주도민의 의지·열정·염원 담아
아내 후배 현종건 소령 작곡·김진열씨 작사
제주일보·KBS 등 지원 도민 공연 잇따라
▲ 도민화합의 기치를 내걸고 탄생한‘제주도의 노래’는 오현중·고 관악대 재발대식에서 처음으로 발표됐다. 사진은 재발대 되기 이전의 오현고 관악대.

<‘제주도의 노래’ 탄생>
내가 제주도지사에 부임하고 나서 안타까운 점이 바로 제주도민들이 문화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무척 소외돼 있다는 것이었다.

 

또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가 너무 적고 문화적 차별과 소외감을 도민 스스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제주도민은 해방이후 4.3과 6.25전쟁을 거쳐 군사정부가 들어설 때 까지 어느 지역보다 차별을 받고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고단했던 제주도민의 민심을 바로잡고 단합을 통한 제주개발의 기치를 올리고 문화예술 향유기회를 부여하기 위해선 특별한 수단과 방법이 필요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먼저 추진 한 것이 바로 도민화합과 제주도민의 긍지를 살리기 위한 노래 공모였다.

 

1961년 10월 공모전을 공고했고 이에 출품한 작품 가운데 ‘제주도의 노래’와 ‘제주개발의 노래’ 2편이 선정됐는데 시상식은 이듬해인 1962년 2월7일에 있었다.

 

도민화합의 기치를 내걸고 탄생한 것이 바로 ‘제주도의 노래’였던 것이다.

 

가사는 일반 도민을 대상으로 공모해서 채택됐으나 곡조는 전문 음악인에 위촉해 만들어졌다.

 

‘제주도의 노래’는 초대 예총제주도지부장이었던 양중해씨의 부인인 김진열씨가 작사한 것이고 ‘제주개발의 노래’는 음악교사였던 김옥찬씨가 작사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양중해씨가 심사위원에서 스스로 빠졌는데 자신의 부인 이름으로 출품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홍순만 공보과장으로부터 들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나 ‘제주도의 노래’ 원래 작사자는 양중해씨 본인이었으나 부인인 김진열씨 이름으로 출품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제주도의 노래’는 양영식 전 통일부차관의 표현대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참 훌륭한 곡이고 마음에 와 닿는 가사”라고 할 정도로 제주도민의 마음을 잘 표현한 곡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주도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제주개발의 뜻을 모으고 보다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그 노래에 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주도의 노래’를 작곡한 사람은 내 아내의 서울음대 후배이자 당시 공군교향악단을 지휘하던 현종건 소령인데 장래가 촉망되던 음악가였다.

 

나는 당시 이 노래를 작곡할 음악인을 홍순만 공보과장에게 알아서 찾아보라고 했는데 홍 과장은 처음에는 유명한 음악가인 김동진 선생을 찾았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고 다음으로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아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선생을 찾았지만 연결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 내 아내의 후배인 현종건 소령에게 이어졌던 것이다.

 

당시 일부에서는 현종건 소령이 내 아내의 성과 같은 성씨인 현씨여서 나의 처남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현종건씨는 서울오페라단과 현제명의 춘향전을 공연하고 ‘젊은 보라매’,‘하늘의 행진곡’등 유명한 공군의 군가를 작곡한 음악인인데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지금도 서울제주도민회 행사 때마다 도민들이 모여 부르는 제주도의 노래를 들으면 지사 재임당시 제주도민들과 함께 제주도개발에 몰두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한라의 장한 기상 바다로 뻗고/ 태평양 푸른 물결 감돌아드는/여기는 조상들의 피땀 어린 땅/우리가 나고 자란 생활의 요람/어서 다 일어서라 굳게 뭉치어/살기 좋은 제주도를 만들어 내자.
높은 산 기슭에는 광막한 들판/넓푸른 바다에는 풍부한 어장/ 이 고장 산과 들에 피땀을 붓고/푸른 산 좋은 밭을 가꾸어 내고/끝없는 수산자원 개발하여서/풍요로운 제주도를 만들어내자.
산 좋고 물 좋은 곳 우리 제주는/옛부터 내려오는 풍속 좋은 곳/지난 날 버림받던 설움을 씻고/새나라 건설하는 아침을 맞아/우리는 서로 돕고 부지런하여/아름다운 제주도를 만들어 내자.“

 

나는 이같은 ‘제주도의 노래’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레코드판으로 제작했는데 노래는 남자솔로인 바리톤인 신경욱씨, 여자 솔로인 소프라노 민경자씨가 불렀고 KBS합창단이 참여했으며 이남수가 지휘하는 KBS관현악단이 반주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레코드판은 각급 관공서와 학교에 보급됐으며 각종 의식 때 제주도의 노래를 연주하고 부르도록 의식적으로 추진했다.

 

제주사회가 재건 부흥의 기치를 내걸면서 도민통합이 절실히 요구되던 시대적 요청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제주도의 노래’였다.

<오현중.고 관악대의 재발대>
오현중.고의 관악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악대였는데 내가 지사 재임했을 때는 여러 문제로 해체된 상태였다.

 

나는 해군출신으로 해군 군악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 있는 관악대는 반드시 재건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음악가인 고봉식씨가 이 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관악대가 3년간의 공백기를 딛고 1962년 6월23일 재발대됐다.

 

무엇보다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오현중.고 관악대 재발대식에서 처음으로 ‘제주도의 노래’가 관악대에 의해 발표된 것이다.

 

나는 오현중.고 관현악단의 재발대를 기쁘게 축하하며 작은 선물인 메트로놈을 기증했다.

<도민 위안 공연 수시 개최>
5.16군사정부 출범 이후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고 재건 부흥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많은 공연을 기획했고 이 공연을 통해 도민화합과 개발의 의지를 북돋우려 했다.

 

당시 도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에는 KBS제주방송국과 제주일보 등 언론의 역할이 컸다.

 

1961년 7월18일 관덕정광장에서 도민위안방송예술제라는 대형 공개방송이 개최된데 이어 10월28일에는 제주도 주최의 시민위안 노래자랑, 11월30일에는 동 대한 노래자랑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1962년 3월24일 열린 한라산 횡단도로 기공식 경축공연에는 해병고적대와 의장대가 해군함정으로 수송됐고 KBS중앙방송국 위문단까지 내도해 제주공설운동장에서 임택근 아나운서의 사회와 진해해군통제부 군악대 주악, 어린이 합창단이 제주도의 노래와 제주도개발의 노래 두곡을 제주에서 처음으로 전국 생중계되기도 했다.

 

이때 마난 임택근 아나운서와는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며 가깝게 지냈다.

 

이 위문단은 KBS중앙방송국관현악단과 송민도 현미 도미 박재란 등 당시 유명연예인들이 참여했으며 제주시를 비롯해 구좌읍 송당리, 세화리, 대정읍 모슬포, 성산포, 서귀포에서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또 재건국민운동본부도 이같은 대형 공연을 직접 주최하며 도민화합을 이끌었다.

 

1961년 10월12일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주최로 군관민 위안의 밤이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됐는데 도민 2만여명 운집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이 공연 전날에는 유명 배우인 김승호 김진규 문정숙과 유명 가수인 문혜란 등이 참여하는 공연도 제일극장에서 열렸는데 만원사례였다.

 

배우인 김진규, 김승호씨는 도지사 공관으로 찾아와 교분을 나눌 정도로 인연을 맺었는데 이후 제주도를 알리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또 10월23일에도 인기 연예인 30여명이 초청돼 관덕정 관장에서 도민위안의 공연이 펼쳐졌고 1962년 8월5일에는 혁명정부 공보부의 주선으로 태극단(신세영 인솔)소속 연예인 33명이 해군함정 편으로 제주를 찾아 전도 순회 공연을 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