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제주관광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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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자본유치 총력...제주관광호텔 건립 성과
박정희 의장 "호텔 없으면 관광발전 없다...현대식 호텔 필요"권립 권유
김평진씨 사업공로인정받아 문화훈장 받아

<>재일교포 고향 투자 제1호
한라산 횡단도로 개설 포장공사가 진행되는 길의 혁명이 이뤄지고 지하수 개발이 추진되면서 제주도민의 오랜 숙원인 물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제가 바로 제주개발을 위한 민간투자문제였다.

 

이를 위해 나는 성공한 재일교포의 자본을 고향에 유치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그 첫 성과가 제주관광호텔을 짓는 일이었다.

 

나는 1962년 들어 그동안 단절됐던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의 고향방문을 추진하고 제주개발의 청사진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고향에 투자할 것을 유도했다.

 

나는 제주도가 관광산업 발전 가능성이 높으나 고급 관광호텔이 없어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장 먼저 호텔건립 투자자를 찾는 일이었다.

 

나는 당시 제주도에 호텔이 없으면 관광산업의 발전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고 관광 제주에 호텔이 없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은 일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제주도를 방문했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제주도내에 호텔이 없어서 도지사 공관에 묵었던 것이다.

 

박 의장 역시 제주도에 현대식 호텔이 필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마침 일본에서 재일제주개발협회가 만들어지고 이사장을 맡은 김평진씨가 1961년 4월 고향 방문차 한국에 들어온 기회를 살려 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남을 주선했고 나와 박 의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제주관광호텔을 직접 짓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사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제주관광호텔을 지을 부지를 물색하고 삼성혈 서쪽에 있던 시내 중심가의 국공유지 830평을 58만1000원에 김평진 이사장에게 불하하는 등 행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지원했다.

 

호텔 건립부지가 확정된 것이 10월6일이고 기공식을 17일에 열렸으니까 10여일만에 모든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제주 관광호텔은 김평진씨가 처음 건립 의사를 나타낸 지 6개월만에 기공식을 가질 정도로 급속도로 부지매입과 각종 행정적 인허가 절차를 마무리하는 성과를 낸 일이었다.

<>제주관광호텔 공사현장에 매일 출근
나는 1962년 10월17일 제주관광호텔 기공식을 가진 이후 매일 공사현장으로 출근해 실질적으로 공사감독 역할을 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고 애정을 쏟았다.

 

제주도내 첫 민영 현대식 관광호텔인 제주관광호텔은 3000여만을 들여 지하1층, 지상3층에 연면적 734평 규모였으며 모두 30실의 객실로 지어졌다.

 

귀빈실 2실과 양실은 16실이었으며 한실과 일본실이 12실이었다.

 

당시 제주관광호텔은 도내 최초의 현대식 건물이기도 한 만큼 많은 도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제주관광호텔이 짓기 전 제주도에는 1959년 8월 정부가 운영하던 서귀포관광호텔이 유일했다.

 

서귀포관광호텔은 온양, 해운대, 무등산, 설악산 호텔 등과 함께 정부가 관리하고 운영하는 지방국영호텔의 하나로 객실도 8실밖에 갖추지 않은 소규모로 주로 군부나 고위직 공무원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제주관광호텔은 첫 삽을 뜬 지 1년만인 1963년 10월13일 완공됐는데 호텔 개관식에는 나를 비롯해 도내 각급 기관장과 도민 등 1천여명이 참여해 축하했다.

 

이때 참석했던 일부 인사들은 안이 훤하게 보이는 유리문을 문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호텔안으로 들어가다가 유리문에 부딪히는 등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호텔을 지은 김평진 이사장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제주숙박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학고 고급화의 불을 당겼다.

 

이후 김평진 이사장은 1966년 서귀포에 관광호텔을 지었는데 대지 1279평에 지하 1층 지상3층, 연건평 1279평으로 양실 50실, 한실 40실을 갖춘 도내 최대 호텔이었다.


<>재일교포와의 유대강화
나는 당시 개관식 축하인사를 하면서 재일교포와 유대강화를 특별히 강조하면서 4.3당시 불가피하게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의 영향을 받아 좌익활동을 해온 제주출신 재일동포문제를 거론했다.

 

재일교포들의 과거 전력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고향의 제주개발에 동참을 호소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행한 연설은 “지난 날 재일교포 가운데 비록 과오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그것을 물을 때가 아니다. 조국의 근대화과업을 위해서, 그리고 낙원 제주도의 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유대를 단단히 하고 나아가야 할 때이다. 앞으로 향토방문을 희망하는 교포들에게 대해서는 나는 언제든지 이를 초청할 계획이며 제주도당국은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는 요지였다.

 

당시만 해도 한일간 국교가 이뤄지기 전이었고 한-일간 관계는 냉랭한 때였으나 정부차원의 국교가 이뤄지기까지 기다린 후 재일교포들의 고향투자를 미루기에는 제주도개발은 시급한 일이었다.

 

실제로 나의 이같은 판단은 다음해인 1963년 초 1945년 광복이후 일본정부로 처음으로 공식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도 나의 진정성을 알아준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의 지원에 힘입어서 말이다.

 

또 좌우를 떠나 재일교포와의 유대강화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해 일부에서는 조총련계에 의심과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나 결국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한신 내무부장관의 과감한 결단이 뒷받침됨으로써 결실을 보게됐다.

 

결과적으로 나의 이같은 판단과 정책은 과거 조총련계로부터 영향을 받던 재일동포들이 우리 진영으로 대거 이동해오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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