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제주도내외 교통망 근대화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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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근대화, 제주 관광산업 발전 이끝 토대"
가야호 도라지호 아리랑호 연이어 취항
취임후 도민 교통불편 해소 다짐 실현
여객선 이어 항공기 매일 취항시대 개막
탑승률 상상 관광우선개발지역 급부상

1963년은 제주도에서 해상 항공 교통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룬 해였다.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해상 정기선이 매일 다니기 시작했고 항공교통도 매일 운항시대를 연 의미가 깊은 해였다.

 

이전만 해도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배들의 규모가 작아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운항을 하지 못했고 운항을 하더라도 배가 낡고 속력도 느려 늘 불안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해상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다.

 

더욱이 제주항에는 큰 암초가 있어 큰 배가 다니지 못했는데 해군 UDT가 와서 폭파를 해줘서 제주항에 대규모 선박 운항이 가능해졌다.

 

특히 여객선의 대형화를 이룸으로써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제주도를 처음 방문해 도민들과 한 약속을 지킴으로서 혁명정부가 제주도민들의 신뢰를 확고히 했다.

 

이같은 제주도의 교통근대화는 제주관광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어가는 토대가 됐다고 본다.

 

제주의 항공교통과 해상교통망이 개선돼야 제주도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고 도민들의 불편 해소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제주도에 초현대식 관광호텔인 제주관광호텔이 문을 열어 제주관광의 고급화시대를 열었고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 개통은 제주개발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63년 1월 4일 제주~목포를 연결하는 정기여객선 덕남호가 제주항 동부두에 취항했는데 제주를 출발해 7시간이면 목포에 닿을 수 있는 배였다.

 

덕남호는 2일간격으로 주간에 운항했다.

 

이어 8월 13일에는 500t급 가야호가 취항해 제주~목포를 6시간대에 도달하는 쾌속정기선시대를 예고했다.

 

9월 28일에는 제주~ 부산을 오가는 973톤급 당시로선 초대형 호화여객선 도라지호가 취항하면서 제주의 해상교통은 혁명적 변화를 맞기 시작한 것이다.

 

도라지호는 부산~제주 간을 12시간이면 갈 수 있었고 무선전화와 독방, 특등실과 1, 2등실 침대를 갖춘 초현대식 선박이었다.

 

특히 이 여객선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5·16후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이후 정부 부처에 제주해협을 악천후에도 제주도민들이 편안하게 육지를 다닐 수 있도록 지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여객선은 국제입찰을 통해 일본조선소에 6000여 만원에 낙찰돼 만들어졌다.

 

혁명정부가 추진한 제주기점 해상교통수단 확충사업으로 제주도민을 위해 만든 배로 매일 운항하면서 제주 해상교통의 1일1발제 시대를 처음 열었다.

 

여객선 도라지호가 제주항에 입항했을 당시 선박의 규모가 어찌나 컸던지 취항식에 참석한 도민들은 선박의 웅대한 스케일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랐던 적이 있다.

 

도라지호에 이어 제주~부산 간 918t급의 아리랑호가 취항했는데 이 배는 원래 부산~시모노세키를 운항하던 대형 여객선이었다.

 

그만큼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여객선의 대형화와 정기화가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연락선 규모가 커지고 속도도 빨라지니까 제주사람들 뿐만아니라 육지 관광객도 제주를 오가는 것이 편안하고 안전해졌다.

 

내가 처음 제주도지사로 취임한 후 처음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지방장관회의차 출장갈 때 일부러 배를 타면서 도민들이 느꼈던 불편함과 불안함을 반드시 해결해야겠다는 다짐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육지연계 해상교통수단의 대형화와 정기화를 추진하면서 눈을 돌린 것이 바로 항공교통의 확충이었다.

 

내가 도지사로 있을 당시만 해도 제주비행장은 제주도의 관문이었음에도 비행장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원시적 상태였다.

 

당시 주 3회 운항하던 KNA기를 이착륙시키기 위해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야할 정도였다.

 

대합실도 나무 의자 3~4개만 달랑 있었고 활주로와 대합실에는 일반전기가 없어 자가발전으로 불을 밝혀야 했다.

 

이 때문에 비행기 이·착륙도 일출 후 일몰 전까지만 허용됐었다.

 

제주도를 최고의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선 항공수단도 최대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제주를 오가는 비행기가 매일 떠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제주발전의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항공기 운항을 연장하기 시작했다.

 

기상이 나빠 오늘 못뜨면 내일 떠야 하고 그래야만 관광사업이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1962년 3월 KNA(대한국민항공사)가 사라지고 6월 19일 KAL(대한항공공사)이 정식 발족하면서 제주지사가 만들어졌고 12월 4일부터 서울~광주~제주를 주3회씩 운항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주~부산 간을 주 3회 운항하고 제주도와 다른 도시 잇는 항공기 탑승률 상승하면서 제주도가 관광개발에 우선 지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6월 15일 대한항공이 주 5회 제주~서울간 운항하던 것을 매일 운항하는 체제로 전환됐고 제주-광주는 주 4회, 제주~부산은 주 3회로 운항하면서 매일 운항시대를 열었다.

 

비행기가 매일 운항하는 것을 관심을 갖고 봤는데 매일 뜨니까 이용객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 것 역시 한라산 횡단도로 개통 포장사업과 같은 논리대로 처음에 이용객이 없다고 비행기 노선을 만들지 않으면 비행기를 아예 이용할 수 없지만 일단 노선을 신설하면 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이용객 수도 점차 늘 수 있는 것이다.

 

비행기 회사도 처음에는 이용객도 없는데 매일 운항하면서 경비를 출연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으나 해보니까 이용객이 늘어나고 회사도 역시 발전했다.

 

지금와서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 내가 현역 군인이고 혁명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제주발전을 위해 비행기 회사에 압력을 넣어 비행기 운항횟수 늘인 것이다.

 

혁명 났으니까 비행기 회사도 말을 듣었을 것이고 제주를 연결하는 비행기의 운항횟수가 는 것은 강압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본다.

 

다행히도 대한한공공사 사장이 현역 공군 신유협 장군으로 나와는 친분도 있고 해서 제주기점 노선의 매일 운항을 요구했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께서도 그렇게 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지금의 대한한공이 이처럼 발전한 것도 제주기점 노선을 확충하며 발생한 초기 적자를 감수하는 과감한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렇게 해상교통과 항공교통에서 매일 운항시대가 오니까 도민들도 사기가 올랐다. 언제든지 서울이고 부산이고 갈 수 있었으니까.

 

비행기가 일주일에 2번 운항할 당시에는 날씨가 나쁘면 지연되고 해서 어떨때는 1주일에 1회도 운항하지 못할 때를 생각하면 기적적인 일이었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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