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김영관 제주도지사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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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지사의 남다른 열정이 '길.물 혁명' 이끌어
박정희 의장과 돈독한 인연 제주개발 가속화 도움
'군사+행정' 적절히 조합하며 문화 정책에도 관심

제주도 개발의 선구자인 김영관 제12대 제주도지사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길의 혁명’과 ‘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원동력은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추진력이다..

 

특히 김 지사는 제주도 발전에 대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현안진단이 정확했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제주도민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김 지사는 또 당시 중앙정부의 정책과 제주도의 정책을 일체화 시키며 어느 지역보다 많은 예산을 확보하는 교섭력을 보여줬다.

 

김 지사는 참모들의 정책판단자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현장을 확인하고 문제점을 짚어내어 해결책을 구한 후 과감하게 추진하는 결단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리더였다.

 

김 지사는 무엇보다도 제주도가 육지부와 다르다는 특성을 살려 제주도의 실정에 맞는 개발논리를 세우고 도민들의 실제생활에 도움이 되고 제주발전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해 집중하는 효율행정의 모범을 보여줬다.

 

김 지사는 현역군인으로 도지사에 임명돼 일반 행정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전무했음에도 오로지 합리적인 상식과 관, 민, 언론과의 활발한 소통으로 이를 극복했다.

 

이와함께 당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역 해군준장의 신분으로 도지사에 임명 김 지사가 갖고 있던 군사정부내 광범위한 인맥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의 돈독한 인연은 제주개발의 고속도로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김영관 해군제독은 당시 중앙정부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받던 제주도의 상황으로 볼때 제주개발을 위한 맞춤형 도지사였던 것이다.

 

김 지사가 전도의 마을을 순회한 후 도민들에게 제시한 제주발전 모델은 같은 섬인 하와이와 홍콩과 같은 국제관광도시, 국제자유항이었다.

 

제주도를 동양의 하와이, 동북아의 홍콩과 같은 번영을 약속하는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혼란한 해방정국, 미군정기의 4.3, 단정수립,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중앙정부로부터 버림받은 땅, 저주의 땅, 소외된 섬에 불과했다.

 

제주발전을 일으킬 내부동력을 모두 잃은 채 도민들은 피폐한 삶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 지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제주도는 정부로부터 버려진 곳과 다름이 없었고 도민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며 “도민들의 체념적인 삶을 바꿀 무엇인가의 전환점이 절실했다”고 말했다.

 

특히 김 지사는 4.3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해 조상대대로 살던 중산간 마을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쫓겨나 방황하던 이재민들을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4.3이재민 원주지 복귀 사업’을 지사 부임후 첫 번째 사업으로 추진했다.

 

도민들의 아픔과 함께 하며 이를 달래며 보다 나은 삶에 의욕을 불어넣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도민과의 소통 없이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정책이었다.

 

더욱이 김 지사가 제주도내 거의 전 마을이 수도가 없어 용천수와 빗물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는 도민들의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김 지사를 놀라게 한 이 사실이 제주도에 물의 혁명을 이룬 지하수 개발의 시작점이었다.

 

제주도가 빗물과 용천수에 의존하다 지하수 개발에 성공해 수도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불과 50년 전의 일이었고 도민들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김영관 지사는 역대 제주도지사 가운데 대 중앙정부 교섭능력이 가장 뛰어난 지사중 한 명이다.

 

김 지사의 대 중앙정부 교섭방식은 첫째, 상경중에 혁명주체세력과 자주 접촉해 제주도의 실정을 널리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것, 둘째, 중앙 정계의 인사들을 제주도로 초청해서 친 제주파를 만드는 것, 셋째 정책결정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편지나 안부를 전하면서 제주의 실정과 지원을 호소하는 것, 넷째 제주도지사 공관을 친 제주사람으로 만드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것에 더해 중앙정부인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제주도 개발의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고 반대 입장을 논리적으로 끈질기게 설득한다는 것이다.

 

물론 김 지사를 든든하게 지원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제주도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도 있으나 중앙정부가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정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군사정부내 장관과 최고위원 등 주요 핵심 인사들 거의 전부가 제주도를 다녀갔고 김형욱 최고위원 같은 어떤 인사들은 제주도맨이 되어 제주도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든든한 우군이 되기도 햇다.

 

그 결과 제주도의 예산이 충청북도의 예산보다 많은 적도 있었는데 이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당시 서무계장을 지낸 이군보 전 지사는 “제주도가 추진하는 그해 사업에 부족한 예산은 다음해 예산을 미리 당겨서 쓸 정도로 김 지사의 중앙정부 교섭력은 뛰어났다”고 기억했다.

 

김 지사는 육지와 연결되는 교통망이 낙후된 문제를 직접 겪어 보기 위해 서울 출장길을 비행기가 아닌 배와 기차편을 이용했다.

 

또 제주개발의 상징이자 신호탄이 될 한라산 횡단도로 개발을 위해 직접 수차례 현장을 답사해 가능성을 확인하고 중앙정부 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관철시켰다.

 

중앙정부의 도로개발 규정과 논리를 뒤엎고 제주도의 독특한 상황논리를 내세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움직인 것이다.

 

김 지사가 지사재임당시 추진한 굵직한 사업만 해도 4.3이재민 원주지 복귀 사업, 지하수개발, 관광산업 육성, 연륙교통망 확대, 사회간접자본 구축, 농업생산체제의 전환(환금작물과 특용작물, 감귤산업 육성), 지역인재 육성(제주대 국립대승격), 중산간개발, 재일동포와 유대강화, 문화예술정책강화 등이 있다.

 

이 모든 사업들이 속전속결,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성공적으로 추진돼 제주발전의 결정적 기반이 됐음은 물론이다.

 

김 지사의 치밀한 현안진단과 적절한 문제해결력이 아니었으면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작고한 홍순만 문화공보실장은 생전에 “김 지사는 군사학이 바탕이 된 미국의 행정학을 도입해 도 행정을 과학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행정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책기획 실명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홍 실장은 또 “문화정책은 군정시기임에도 지금보다 뒤처지지 않은 문화행정이었다”며 “김 지사의 민간 배려는 각별했는데 중산간 지역에서 말을 타고 순행하다가도 노인을 마주하면 즉시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홍 실장은 이어 “김 지사는 4.3의 아픔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재일동포를 설득해 투자재원확보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무엇보다 도민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 기울였다”며 “제주도의 노래 역시 그런 정책추진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김 지사를 기억했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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