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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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호 세화고 교장/시인

조각 하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왜 그럴까. 영국의 시인(T. S. Eliot)은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cruelest)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만 유지했으니….


‘잔인에서의 탄생’은 역설(Paradox)이나, 맞다. 탄생은 잔인하리만치 진통을 수반한다. 그 아픔을 어떻게 말할까. 지난 11일 총선(總選)이 이랬었다. 단 한 사람으로 뽑히기 위한 그 행보의 모습은 잔인하다는 표현이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무슨 말을 들을지언정 이기고 보자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다. 정글 속처럼 싸워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1등만 살아남는다고 하여 인격을 훼손하려들면, 인격이 없는 정글에서나 살다가 정글에서 죽게 될 것이다. 역설이란 상반된 두 말이 맞다는 것이다. 당선만 되면 터무니가 있게 된다? 잔인한 탄생에 박수를 보낸다.


조각 둘. 체험학습(수학여행) 인솔, 공항으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어!? 우리학교 학생들 같지 않다. 적지 않은 아이들, 치마가 갑자기 짧아졌다. 듣고 보니, 등교용 치마와 외출용 치마가 다르다나. 교복은 유니폼(Uniform)인데, 다르면 유니폼이 아니지 않은가. 교복제조판매업체들은 할인까지 끼우며 미니치마 구매충동을 부추긴단다. ‘소녀시대’에 끼고 싶지 않은 소녀가 있겠는가. TV화면 연출가도 맞다. 그에 맞추어 이윤을 내려는 사람도 틀리달 수 없다. 학생의 정장은 똑같은 교복이라고 목이 터져라 반복하는 교사도 또한 고전(古典)처럼 맞다. 참으로, 시류(時流)의 역설들이다. 장자(莊子)에게 물어 봤더니, 그냥 놔두어도 치마가 무한정 짧아지지는 않는다는 역설적 답변이다.


조각 셋. 훈화 중의 한 조각. 하루 중 가장 힘든 게 무엇인가고 필자에게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대답 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가장 힘들다고. 조금이라도 더 뭉그적거리고 싶다. 잠은 엄마 품이다. 그 속에 더 있고 싶다. 잠을 깨우는 세상이 싫다. 싫은 정도를 너머 잔인하다. 그러나 어쩌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니, 잔인하게 어려운 그 순간을 의식의 열쇠로 열어야 할 것이 아닌가. ‘황무지’도 계절의 순환 속에서 다시 봄이 되어,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모든 생명체의 고뇌를 수용하고 있다. 망각의 눈에 쌓인 겨울은 차라리 평화로웠지만 다시 움트고 살아나야하는 4월, 그래서 잔인한 것이리라. 하루부터 발아시키자. 학생들아, 지각하지 말자.


조각 넷. 물 건너야(濟) 닿는 고을(州), 제주(濟州)는 섬이다. 이 섬에서 1948년 무자(戊子)년 4월에 4·3이 일어났다. 반도육지를 위해 안산(案山)과 같이 지리적 역할을 하는 이 섬, 이곳 사람들을 섬 전체 불태우듯 죽이려 한 것은 무엇에서였을까? 1945년의 무정부(Anarchy)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나뉘었고, 그 회오리는 학살을 자행했다. ‘볶은 콩에서도 싹이 났구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할머니가 필자를 보며 한 말이다. 조부모·백부모와 그 자녀·숙부삼형제·육촌까지…. 모두 돌아가셨다.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나이도 구분이 없었다. 이념(ideology)은 잘살아 보자는 철학이다. 살상이 있으면 어떤 이념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어떤 경우든 앞으로는 이 섬에선 4·3의 재판(再版)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자이크로 4월을 그리고 싶다. 라일락을 키우듯, 정성껏 곱게 붙여가고 싶다. 그 잔인성 이상으로 모든 이에게 쾌청(快晴)처럼 쾌(快)로 잇는 조각들을 주시옵소서. 오는 5월엔. 합장(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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