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쟁 중 반격의 발판 마련한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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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50만 장병 배출...모슬포 군사도시로 탈바꿈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22일 서귀포시 대정읍에 들어선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는 신병을 대규모로 양성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고 처절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뺏기면서 ‘1·4후퇴’를 맞아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유사시 최후의 거점은 제주도였다. 전쟁 중 사단별로 신병을 훈련시켰던 방식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장병을 배출할 구심점이 필요했다. 육군 제1훈련소가 모슬포에 들어선 이유다.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만 5년 동안 대략 50만 장병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각종 사료와 증언에 따르면 제1훈련소는 거대한 천막도시였다. 전시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건물을 지을 겨를이 없어 막사는 거의 천막으로 지었다.

훈련소 면적은 198만㎡(약 60만평) 규모로 모슬봉 남쪽에 본부가 있었고, 보성리와 인성리 방면에는 연대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에 공병대와 헌병대, 정훈부, 통신대, 하사관학교, 병참대가 들어섰다.

많게는 전체 병력이 7만명에 이르면서 숙영지는 안덕과 화순, 서귀포 상예동 등 5곳으로 퍼졌다. 지금은 훈련소 정문 기둥과 지휘소, 의무대 등이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상자가 늘면서 전방에선 병력이 부족해졌다. 장병들의 훈련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짧은 기간 중 진행된 훈련은 엄하고 혹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은 화순 백사장인 항만대로 상륙함(LST)과 수송선으로 띄우며 장병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공군사관학교는 1951년 2월 1일부터 4월 23일까지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비록 80여 일의 짧은 기간임에도 장교 후보생 1000여 명을 이곳에서 배출했다.

이를 기념해 학교 교정에는 훈적비가 세워졌고, 주민들은 ‘보라매탑’으로 부르고 있다.

앞서 이곳에선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역사적인 군사 유적이 남아있다.

훈련소 병사 건물과 세면장, 사열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돼 등록문화재 410호로 지정됐다.

60년 전 모슬포는 ‘군사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피난민들은 훈련소 주위에 몰려와 힘든 삶을 꾸려 나갔다.

훈련병들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군복이나 양말 등 군용 물품들이 거래됐다. 모슬포 주민들은 삶은 고구마를 배고픈 훈련병에게 팔아 용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모슬포 중심지 용천수인 ‘신영물’에는 피난민들이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었고, 이 물가의 앞 도로변에는 고구마와 보리떡 같은 간식을 파는 즉석 판매장이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신영물 취수장 밑은 빨래터로 대정 부녀회원들은 훈련병들이 쏟아낸 엄청난 양의 군복을 빨래하는 데 함께 도와줬다.

모슬포 훈련소는 경제·산업·사회뿐만 아니라 예술과 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제주에 영향을 끼쳤다.

훈련소 전속악단인 군예대(軍藝隊)가 이곳에서 창설해 유호, 박시춘, 황금심, 구봉서 등 연예인들이 동참했다.

박시춘 선생은 군예대장을 맡아 활동했는데 그가 작곡한 노래 ‘삼다도 소식’은 모슬포 바다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피난민 속에는 국가대표급 선수들도 있었다. 당시 제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선수로는 축구에 박병석, 민병대, 최정민이 있었고, 탁구는 이경호와 박광덕, 유도는 남수웅이 있었다.

훈련소에는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장성들의 방문과 훈련 참관이 줄을 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 및 참전국 대표단이 수시로 모슬포를 찾았다.

대정고등학교 앞 너른 터를 ‘워커 운동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워커 장군이 훈련소를 방문한 기념으로 붙여졌다.

군사유적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 온 김웅철 대정고 교사는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는 광복 직후 한국군 창설과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적”이라며 “유적이 훼손되는 가운데도 변변한 역사관이나 박물관이 없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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