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읍 산이수동 중공군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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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 도로 및 성당 공사에 동원...냉전시대 산물 수 십년간 방치
▲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에 설치됐던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물 잔해. 수 십년 동안 마늘밭으로 개간되면서 석축은 돌담으로 이용되는 등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포함해 포로가 16만명에 육박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 포로를 제주도에 수용하기로 했다.

1952년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 일대와 모슬포비행장 등 3곳에 중공군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 위해 산이수동 민가에 철거령을 내려져 주민들은 삶터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수용소의 정식 명칭은 ‘제20수용소’로 물이 나는 곳에 세워지다 보니 산이수동 일대에 들어서게 됐다.

포로들은 상륙함(LST)에 실려 모슬포로 들어왔다. 제주도에 수용된 중공군 포로 중 본국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는 제주비행장에, 송환을 원하지 않는 반공포로는 모슬포비행장에 수용됐다.

1953년 2월 포로 수용인원은 제주비행장에 5809명, 모슬포에는 1만4314명이 있었다.

수용된 포로들을 모슬포와 사계리 간 도로 건설에 동원됐고, 모슬포 성당을 짓기 위해 흙을 메우는 기초공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많은 포로들이 머물면서 아일랜드 출신 설리반 군종신부는 사목활동을 펼쳤다.

제주비행장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3주년을 맞아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

수용소를 경비하던 미군 2개 소대가 이들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 56명이 죽고, 113명이 부상을 당했다.

1년 정도 수용소에 머물던 반공포로들은 대만으로, 친공포로들은 중국으로 송환됐다.

산이수동에는 지금도 중공군 포로들이 머물렀던 수용소 터가 있다. 길이 20m, 높이 2m 정도의 석축벽에는 창틀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20년 동안 마늘밭으로 개간돼 밭 돌담으로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표지석도 없이 방치된 상태다.

6·25전쟁 당시 사상의 대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냉전시대의 산물인 포로수용소 터는 훼손이 가속화되면서 보존 방안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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