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고위직 머물던 별장 '한림청장(翰林淸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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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신축, 해방 이후에도 유명인사들 머물러
▲ 한림읍 옹포별장가든 내에 있는 한림청장 건물. 1929년 별장으로 신축된 이래 많은 유명 인사들이 다녀갔다. 낡아버린 출입문과 창문 일부를 대신해 비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무로 덧대서 가림막을 설치했다.
한림읍 옹포별장가든 내에 있는 한림청장(翰林淸莊)은 일제시대인 1929년 지어진 별장이다. 사료에 따르면 경찰 고위 간부로 제주도경 경무보인 이시카와 겐지로가 처음 살았다.

이 별장은 구들장 대신 다다미가 깔린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으로 84년 전 지어진 목조 건물임에도 대들보나 기둥, 바닥은 썩지 않아 고급 목재로 지어진 흔적이 남아있다. 벽돌은 검은 모래를 재료로 만들어 매우 단단하다. 벽체 두께는 45㎝에 이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일본식 소형 사당(제물상)인 가미다나(神棚)가 설치돼 있었다. 소공원도 함께 조성됐는데 한라산과 안덕계곡에서 채굴한 200여 종의 나무를 식재했다.

서쪽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신단이 있다. 일본인이 개인적인 신앙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여기에 새겨진 ‘한림청장(翰林淸莊)’은 1950년대 육군 특무대(정보부대)가 원래 글자를 없애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쓴 것이다. 원래 글자는 알려지지 않으면서 이후 이 별장은 ‘한림청장’으로 불려지게 됐다.

1943년부터 약 2년 동안 이 집에는 제주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던 고위 장성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로 가던 일본 해군 1만t급 수송선 스산마루(壽山丸)와 호위함 2척이 비양도 앞 바다에서 미군 잠수함과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됐다. 일본군 504명이 수장됐으며, 생존자는 16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생존한 일본군 함장은 이 집에 와서 머물렀는데 ‘미군 잠수함이 따라오면서 수심이 낮은 데로 피신했지만 결국 비행기 폭격으로 침몰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때 살아남은 군인과 전사자 유족들은 위령단을 구성해 이곳을 찾아와 ‘비양 위령제’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협재리 주민들은 인류애를 발휘해 생존자 구조에 나섰다. 이 같은 사실은 1976년 위령단장인 마시코겐지가 “온 바다가 피로 물들었고 시체로 가득찼다.

파편이 비오듯 하는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 준 현지 주민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밝히면서 알려지게 됐다.

광복 후 이 집은 제주를 방문한 VIP들의 숙소가 됐다. 김구 선생과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등이 포함돼 있다.

호텔이 없었던 시절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욕실과 화장실, 세면대, 냉장고가 있던 유일한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구리로 제작된 수동식 냉장고는 얼음을 채워 넣어 고기 등을 보관했다.

고위 인사들이 자주 찾다보니 전화국에선 한림읍에 있는 관공서 다음으로 이 집에 전화선을 가설했다. 당시 내선번호는 ‘24번’으로 한림읍에서 24번째로 전화기를 들여 놓은 것이다.

대우 김우중 회장의 부친이자, 광복 후 제주도지사를 지낸 고(故) 김용하씨도 이 집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

홍연천 옹포별장가든 대표는 “일본에서 요리를 배우신 어머니가 고관들이 올 때마다 음식을 대접하고 이곳에 머물도록 배려를 했다”며 “1980년까지 어머니 살았으나 이후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많이 낡았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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