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최초로 빛을 밝힌 우도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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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1905년 러일전쟁 대비, 일본 목재 등간으로 처음 설치
제주의 첫 등대는 우도 등대다. 이는 전국에서 여섯 번째로 목재 건물에 등간(燈竿:등불을 단 기둥)으로 설치됐다.

러일전쟁(1904~1905년)에 대비, 일본 해군성은 1904년 12월 세관공사부에 우도 등대를 시급히 건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05년 1월 우도에 목재가 도착하자마자 하역과 측량이 이뤄져 약 한 달 만에 등대가 완성됐다.

해전에 대비해 급작스레 만들어지다 보니 정식 등대가 아닌 등간으로 들어섰다. 즉, 제주 최초의 등대 역사는 곧 전쟁과 침략의 역사로 시작됐다.

이즈음 우도에는 해군 초소도 들어섰다. 러시아 발틱 함대가 아프리카 희망봉과 인도양을 지나 8개월의 항해 끝에 제주 바다로 향하는 것을 탐지하기 위해 도고 제독은 수병들을 우도로 보냈다.

우도 초소에선 함대가 북상한다는 소식을 보고했고,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일본 함대는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대승을 거뒀다. 당시 해군 초소 유허비는 우도봉에 세워져 있다.

1905년 급조된 등간은 6m 높이의 나무 꼭대기에 석유등을 달아 도르래로 올리고 내린 단순한 구조였다.

석유등의 수명은 50일이었고, 군인들은 등이 꺼지면 기름을 채우고 다시 등탑으로 올려 보냈다.

군사시설이 아닌 바다의 길잡이로 불을 밝힌 것은 이듬해 점등기(가스등)를 설치하면서다.

석유등보다 불빛이 센 아세틸렌 가스등으로 밤바다를 3㎞까지 빛을 비추었다. 이로써 우도 등대의 공식적인 점등은 1906년 3월로 기록됐다.

처음엔 무인 등대였으나 관리 차원에서 사람들이 머물기도 했다. 1908년 대한제국 세관공사부 등대국장이 작성한 공문을 보면 우도에는 직원 1명과 급사 1명 등 등대원 2명이 머물렀다.

등대국장은 우도를 비롯해 등대가 들어선 곳마다 수목이 빈약하고 음용수가 부족한 점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대 인근에 채소밭을 일구도록 했고, 급사까지 골고루 땅과 종자를 나눠줘 경작토록 했다.

사료에 따르면 우도 등대는 가스등을 달고, 여러 번 고치기를 거듭했지만 목재 건물은 바닷바람에 오래 견뎌내지 못했다. 이를 벽돌로 단장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19년이다.

벽돌로 원형 등탑을 쌓으면서 최초의 목제 등대(등간)는 허물어 졌다. 벽돌이 귀하던 시절, 이를 굽고 배로 실어 나른 후 해발 123m의 우도봉 위에 근대식 등대를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도 등대의 중요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일제가 제주의 자원과 도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벽돌을 등짐에 지고 우도봉까지 나르고 시멘트를 타설하는 것은 고된 노동이었다.

전쟁 대비해 급조한 등간에 이어 제대로 된 등대를 지은 것은 일본과 성산포 간 선박과 물자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었다.

또 물살이 급한 우도해협을 지나는 자국의 선박과 군함을 보호할 목적도 있었다.

우도해협과 성산일출봉을 낀 바다는 해상교통의 길목으로 현재 동중국해에서 부산으로 오가는 컨테이너선과 어선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이 등대는 광복 이후에 비로소 등대다운 역할을 하게 됐다. 1958년 축전지와 발전기를 사용해 전원을 공급하는 등명기를 달았다.

이듬해 숙소와 부속 창고를 건립하면서 완전한 유인 등대로 기능을 전환했다.

1960년에는 안개가 끼면 메아리와 비슷한 음성을 내보내는 신호기(사이렌)가 설치됐다.

기술과 장비는 나날이 발전했지만 1919년 지어진 근대식 등대는 2003년까지 84년 동안 운영될 정도로 든든하게 건축됐다.

오랜 세월 밤바다의 나침반이자 파수꾼이었던 구(舊) 등대는 2004년 신(新) 등대에게 바통을 넘겨줬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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