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일제가 구축한 최대 군사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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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비행장(7회)- 1933년부터 착공 1945년 종전까지 12년 동안 확장 공사

일제가 제주도에 구축한 최대의 군사시설은 알뜨르비행장으로 꼽히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 80만평(260㎡)에 조성됐다. 1945년 종전 때까지 확장 공사가 진행됐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현재는 격납고 19개(등록문화재 39호)와 지하터널(312호), 셋알오름 동굴진지(310호), 고사포진지(316호)가 남아있다.

사세보진수부 사령관이 해군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1933년 3월 토지 6만평(20만㎡) 매입을 완료했다고 밝혀 이 해에 착공이 시작된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이한 내용은 항공기지가 아닌 ‘불시 착륙장’을 조성했다고 보고한 점.

연료 보급 등을 위한 비행기 임시 착륙장 또는 피난처로, 중국을 겨냥한 사전 포석이었다.

임시 착륙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침공을 목적으로 한 항공기지로 변모했다. 바다를 건너 공습하는 ‘도양(渡洋) 폭격’의 구심점이 됐다.

나가사키에 있던 오무라(大村) 해군항공부대가 주둔하면서 면적이 20만평(66만㎡)으로 확장됐다.

해군 보고서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농경지를 3개월 만에 모두 매입했다고 밝혀 강제 수탈을 짐작케 하고 있다.

알뜨르비행장으로 인해 6개 마을이 사라졌다는 사료와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야 후미오 비행단 장교는 1937년 8월 파견 나왔던 경험담을 책으로 펴냈다.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난징을 비롯해 남창을 공습한 폭격기들의 귀환을 맞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공습을 마친 폭격기들은 다음 날 다시 난징을 공격하도록 명령이 떨어져 빠른 시간 안에 정비를 마쳐야 했다고 회고했다.

알뜨르에서의 난징 폭격은 36회로 연간 600기가 동원됐고, 투하된 폭탄은 300t에 달했다.

1937년 11월 일제가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오무라 항공대는 본거지를 알뜨르에서 상하이로 옮겼다. 이후 알뜨르는 훈련생을 양성하는 연습 항공대가 설치됐다.

해군 ‘96식 중형폭격기’ 대신 날개가 두 개 달린 복엽기인 ‘아카톰보’(일명 빨간 잠자리) 연습기가 들어왔다.

전투기와 달리 연습기는 주민들에게 많이 노출됐고, 부역을 나왔던 사람들은 연습 장면을 구경하다 일 안 한다고 맞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알뜨르비행장은 80만평으로 더욱 확장됐다. 특설경비 공병대가 배치돼 동굴진지와 고사포진지가 구축됐다.

비행장 인근에 화약창고, 병사, 목재·금속 공장, 발전소를 비롯해 목욕탕까지 들어섰다.

미군 폭격기 B29를 요격하기 위해 한신에 있던 제56비행전대가 이곳으로 이동했고, 사세보의 해군 951항공대 일부가 배치됐다.

1945년 일제는 패전이 짙어졌다. 본토를 지키기 위해 제주도를 미군 상륙의 방어기지로 삼아 육군 58군 사령부가 진출하면서 알뜨르비행장은 요새가 됐다.

송악산에는 인간어뢰로 함정을 격침시키는 해안 특공기지가 설치됐다.

그런데 본토 사수작전(결 7호)을 수행하는 육군은 해군이 조성한 알뜨르비행장이 ‘양면의 칼’이 됐다.

미군의 상륙 예상지점에 근접해 함포 사격에 고스란히 노출됐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에게 빼앗기게 될 경우 역으로 본토를 공격당할 수 있는 비행장으로 내줄 상황에 처했다.

1945년 6월 대본영에선 제17방면군 참모장에게 제주도에 대한 지시사항으로 ‘비행장의 불필요한 공사는 중지하도록 육군과 해군이 교섭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타진했다. 미군이 장악할 것을 염두해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한편 전쟁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대규모 비행장과 동굴진지를 조성하는 데는 주민들의 희생이 따랐다.

대정·안덕·서귀포 주민들이 동원돼 하루 종일 삽과 곡괭이로 고된 작업을 했다. 육체노동은 매우 심했고, 통제와 체벌 역시 심했다.

마을별로 동원이 할당 됐기 때문에 도망치면 가족에게 해가 될까봐 두려웠고, 잡히면 심한 벌이 따르면서 도망에 대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잘 보존된 견고한 격납고(엄체호)는 강제 노역에 동원된 주민들이 시멘트와 자갈, 모래를 나르면서 만들었다. 위에는 흙과 잔디를 덮어 위장을 했다. 허기진 배를 달래며 힘든 노동에 끌려 다녔던 고초는 생존 주민과 노역자들의 증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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