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공격 병기 감춰두기 위해 요새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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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일제 해안 진지동굴
일제가 제주에 남기고 간 상처 중 하나는 아름다운 해안 절벽에 숭숭 뚫어버린 진지동굴이다. 패전의 그늘이 드리워질 무렵 이곳은 해군의 특공기지로 이용됐다.

성산일출봉, 모슬포 송악산, 조천 서우봉, 고산 수월봉, 서귀포 삼매봉 등 5곳의 진지동굴은 76개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곡괭이 자국이 지금도 선명해 도민들의 피땀이 서려있다.

해안 진지동굴 공사는 1945년 2월부터 6월까지 진행됐다. 앞서 1945년 3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 3개월 간 지상전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오키나와 주민 9만명을 포함, 약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은 ‘옥쇄(玉碎)’를 종용 당해 집단 자살을 했다.

일제는 본토 결전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제주도에 오키나와와 비슷한 진지동굴을 구축했다. 제주를 제2의 오키나와로 만들어 희생양으로 삼을 셈이었다.

해군 특공기지에는 자살보트 ‘신요(震洋)’와 인간 어뢰 ‘카이텐(回天)’을 숨겨 놓고 미군 상륙 선단을 공격, 침몰 또는 파손시키는 임무로 편성됐다.

사료에 따르면 신요부대는 1945년 4월부터 공격정(보트) 102척과 특공대원 566명을 제주에 배치했다. 송악산과 서우봉 해안에 진출하려던 카이텐부대는 일제의 패전으로 실행되지 않았으나 어뢰정을 감출 동굴 공사를 진행했다.

진지동굴 내부는 일자(一)형부터 ‘ㄷ’, ‘H’, ‘王’ 등 다양했다. 제주역사문화진흥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진지동굴 구축을 위해 전남지역 광산노동자들이 동원됐다.

성산일출봉 동굴인 경우 전남 광양광산 노동자들이 3차례에 걸쳐 약 800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후 곡괭이로 다듬어 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강제 동원은 도민들이 가장 많았고,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증언에 따르면 작업은 해가 뜨면 시작해 해가 지면 끝났으며, 동굴에 들어가 흙과 돌을 밖으로 실어 날랐다. 점심은 보리와 조를 섞은 밥이 제공됐다.

제45특공대 들어선 일출봉 진지는 섭지코지와 우도가 둘러싸고 외부의 노출 위험이 적은 이점을 안고 있다.

제120특공대는 수월봉 진지에 머물렀는데 공격정을 바다로 보내는 유도로가 발견돼 주목을 받고 있다. 유도로는 밀물이 오면 보이지 않다가 썰물 때면 형체를 드러낸다.

서귀포 삼매봉에는 제119특공대가 배치됐다. 외돌개가 둘러싼 이곳 해안 절벽에는 12개의 동굴 진지가 남아있다.

송악산 진지에는 공격 어뢰정인 카이텐부대가 들어설 예정이었고, 당시 송악산 및 모슬포 해안은 미군의 유력한 상륙지점으로 꼽혔다.

서우봉 진지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보존 상태가 좋고, 해안은 물론 오름 중턱까지 광범위하게 구축했다.

패전 후 일본 해군이 미군에 인도한 목록 상에는 일출봉 특공기지는 동굴 면적 900㎡에 병사(兵舍) 12동,
삼매봉은 동굴 900㎡에 병사 10동, 수월봉은 동굴 760㎡에 병사 12동으로 기재됐다.

카이텐 기지로 추정되는 송악산은 동굴 550㎡ 규모에 병사 6동, 서우봉은 730㎡에 병사 7동으로 기록됐다.

해군 특공부대는 조선 진해경비부 소속으로 주둔 예정은 쿄류(蛟龍), 카이류(海龍), 카이텐(回天), 신요(震洋) 등 이었다. 이 가운데 신요부대만 실제로 제주에 배치됐다.

일본군 군사유적 보고서를 발간한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군은 마지막 결전에 대비해 요새화 된 해군 특공기지을 동굴에 구축했다”며 “특공기지가 들어선 해안 진지동굴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체계적인 연구조사와 보존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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