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중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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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돌하르방’을 달리 ‘옹중석’이라 한다.

이는 중국의 진시황 때 완옹중의 석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키가 20척이나 되고 힘은 수백 명을 당할 정도의 거인이었다.

설에 의하면 진시황은 북방 흉노족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구축하였지만 흉노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다.

대신들에게 그 묘책을 물으니 한 신하가 건의하기를 “완옹중으로 하여금 격퇴 시키소서”라고 하였는데 진시황이 그를 불러 흉노족을 격퇴시킬 것을 명하니 옹중은 “배불리 먹여만 준다면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진시황은 옹중을 이용하여 흉노족을 닥치는 대로 밟아 죽였다. 흉노족이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갔다.

그러나 옹중도 사람인지라 병들어 죽었다. 진시황은 그를 애도하고 그 공로를 생각하여 옹중의 실물과 같은 상(像)을 만들어 궁궐 입구에 세웠다.

한편 흉노족에도 옹중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쳐들어 왔다. 멀리 궁궐 쪽을 바라보니 옹중이 버젓이 서있는 것이었다.

흉노족은 깜짝 놀라 옹중이 죽었다는 말은 헛말이라 하여 앞 다투어 도망쳤다. 이 때 사람들은 완옹중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를 지켰다 하여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제주에 옹중석을 처음 설치한 것은 영조 30년(1754)에 목사 김몽규의 지시에 의해서라고 ‘탐라기년’은 기록하고 있다.

제주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원귀(寃鬼)가 되어 산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막는 방법으로 육지에서는 장승(長承)을 만들어 성문 밖에 세웠고 제주에는 돌이 많아 돌로 옹중석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옹중석은 제주목에 23기, 정의와 대정현에 12기씩 모두 47기가 있었는데 2기는 경북궁 한국민속관으로 옮겨 갔으므로 현재 옛 것은 45기가 있다.

한편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돌하르방 모습과 크기가 다른 것은 관(官)의 등급 차이에서 온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현태용·제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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