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간직해 온 심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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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

제주목 관아는 제주도의 정치와 행정, 문화의 중심지이자, 제주 고유의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제주목 관아는 1416년(태종 16년) 제주도가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의 삼읍으로 나눠지기 이전에도 탐라국의 주요 관아 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관아 건물은 1434년(세종 16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타 버렸는데 그 이듬해 당시 제주목사 최해산이 영청(營廳‧절제사 집무실)인 홍화각(弘化閣)을 건립하면서 종루(鐘樓), 침실, 욕실, 독서방, 정당(政堂‧수령 집무실), 약고(藥庫‧약재 보관실) 등을 새로 지었다.

 

조선 전기 때 문신인 고득종이 이때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쓴 글이 바로 ‘홍화각기’이다.

 

홍화각기에 따르면 당시 제주목의 관아 시설은 총 58동 206칸의 규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크게 훼철돼 관덕정을 제외하고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제주목 관아 발굴조사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그 결과 홍화각과 연희각(延曦閣), 우연당(友蓮堂), 영주협당(瀛洲協堂), 외대문(外大門), 귤림당(橘林堂), 중대문(中大門), 망경루(望京樓), 회랑(回廊) 등 9동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제주목 관아는 1993년 3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80호로 지정됐으며 이후 1999년 복원사업을 시작해 2002년 1단계 정비를 완료하고 이후 지속적인 정비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2012년에는 영주관(瀛洲館) 객사터(客舍址)가 사적으로 추가지정 되기도 했다. 객사터의 현재 위치는 복원된 목관아 북쪽 제주북초등학교 동쪽이며 문헌기록상 제주 성안 북쪽 모퉁이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객사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관사로 외부 관리나 사신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제주목 관아는 복원된 문화재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며 각광을 받고 있다.

 

망경루 1층 내부는 보물 제652-6호인 ‘탐라순력도’를 테마로 역사 체험 공간을 조성, 1700년대 제주의 사회생활, 명승지, 유적 등을 그래픽 패널과 영상물을 통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회랑에는 3개의 전시실로 이뤄진 제주목 역사관이 설치됐다. 제1전시실은 제주목의 역사적 변천사와 발굴 및 출토유물, 제2전시실은 부임 목사의 생활상 및 행렬도, 제3전시실은 제주읍성 내 주요 건물 및 변천사 등을 전시했다.

 

김동전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제주대 재일제주인센터장)는 탐라국 이래 제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서 제주목 관아의 의의를 언급한 후 “제주목 관아는 제주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간직해 온 심장부”라고 규정했다.

 

김 교수는 이어 “제주목 관아의 여러 자원을 활용해 제주시 원도심을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재정립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민성 기자 kangm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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