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자존심’, 최익현
‘조선 선비의 자존심’,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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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인물, 최익현(1833~1906)은 경주가 본관이며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이다.
최익현은 1873년(고종 10년) 당시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상소를 통해 낱낱이 열거하며 고종의 친정과 대원군의 퇴출을 주장하다가 기득권층의 반발로 제주에 유배됐다.


최익현은 1년 4개월의 유배 기간 동안 제주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특히 그는 당시 제주를 대표하던 유학자 이기온(1834~1886)과 가깝게 지내며 제주 유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노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앞장서 항일의병운동을 펼치다 일본군에 체포돼 머나먼 타국 땅인 쓰시마섬(대마도)에 유배된다. 일본군이 주는 음식은 일절 거절하고 병에 걸려도 일본 약물을 쓰지 못하게 할 정도로 기개를 꺾지 않던 그는 결국 유배 중 얻은 병이 악화돼 1906년 11월 이 섬에서 운명한다.


최익현과 관련된 여러 유물 가운데 그의 올곧은 기상이 잘 표현된 유물이 바로 ‘최익현 초상’이다.
최익현 초상은 1905년 조선 말기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작품으로, 전통 성리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최익현의 풍모를 격조 높게 표현했다.
이 그림은 51.5cm× 41.5cm 크기로 비단에 채색을 해 제작했으며 약간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정면 반신상이다.


그림 속 최익현은 머리에 겨울철 사냥꾼이 주로 사용하는 털모자를 쓰고 심의(深衣.유학자들이 입던 겉옷)를 착용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은 갈색 선을 수없이 그어 요철(오목함과 볼록함)과 명암을 묘사하고 있는데 얼굴의 고저(高低)에 따라 밝기를 구분해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털모자의 하얀 털 표현은 거친 질감을 전해주며 얼굴과 의복 등 전체적으로 섬세하기 보다는 건조하고 야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또한 굵게 잡힌 이마의 주름과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등은 항일의병장의 당당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구입해 소장하다가 2001년 국립제주박물관으로 이관돼 보관 중이며 2007년 보물 제1510호로 지정됐다.


김영미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최익현 초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반복적인 붓질을 통해 얼굴의 입체감은 물론 털모자와 심의 등의 양감을 살려 사진을 방불케 하는 점”이라며 “이는 이전의 초상화와는 다른 것으로 근대기 초상화가 갖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학예사는 이어 “근대기 사진술이 들어온 이후 초상화는 극사실성에 무게를 두면서 사진처럼 그리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최익현 초상의 작가 채용신은 보통 대상의 사진을 찍어 이를 토대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고 덧붙었다.


강민성 기자 kangm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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