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냉전·분단 혼란기 수많은 도민 희생당한 현대사의 참극
(3) 냉전·분단 혼란기 수많은 도민 희생당한 현대사의 참극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제주4·3사건, 무장대 봉기 이어 평화협상 무산·공권력 강경 진압 후 유혈 충돌로 악화
   
▲ 제주4.3사건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라는 혼란기 속에서 수많은 주민들의 희생당한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다. 사진은 1938년 무장대의 봉기 이후 토벌대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미군이 찍었다.<자료 제공=제주특별자치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 제주는 8·15 광복의 기쁨도 잠시,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의 회오리 속에서 4·3사건이라는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맞아야 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금기시됐던 4·3사건은 2000년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됐다.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는 희생자 수를 당시 제주도 인구의 9분의 1인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4·3위원회에 신고한 희생자만도 1만4000여 명으로 집계됐다. 이들은 토벌대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다. 어린이와 노인, 여성 등 노약자가 33%를 차지했다.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초토화되면서 300여 마을 2만여 호 4만여 동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했다.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평화로운 마을 공동체가 깨진 것이다.

▲3·1 발포사건=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끝난 후 ‘통일 독립’을 촉구하는 가두 시위 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오후 2시24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육지에서 내려와 있던 응원경찰이 경찰서 습격으로 잘못 알고 발포,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립병원 앞에서도 응원경찰이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3월 10일부터 한국에서는 유례가 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실시됐다.

당시 제주도청은 파업성명서를 통해 발포 책임자 및 발포 경관 처벌,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 보장, 경찰 무장과 고문 폐지, 3·1사건 관련 애국 인사 검속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신보(현 제주일보)는 3월 10일자에 ‘3·1사건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 모집 사고를 게재했다. 이 사고에는 ‘그들 희생자는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 쓰러졌다’는 내용을 담았다. 모금 운동 결과 기탁된 조위금이 31만7118원에 달했다(제주신보 6월 22일자).

이런 가운데 미군정은 3월 8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와 미군정청 합동으로 제주사건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

미 조사단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1947년 3월 14일 기록된 미6사단 정보 보고서의 경우 ‘파업의 근본 원인은 3월 1일 폭동 당시 경찰의 행동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 것 같다. 최근 남로당이 이러한 증오심을 주민 선동에 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군정은 사후 대응책으로 민심 수습보다는 강공책에 주력하는 정책을 폈다.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를 좌익 색채가 강한 섬으로 판단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 등이 내려왔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무장대 봉기=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날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를 비롯해 서청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 선거·단독 정부 반대 및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치안 상황’으로 간주했고, 모슬포 주둔 경비대 제9연대는 도민과 경찰·서청 간의 충돌로 간주했다.

미군정 수뇌부는 4월 17일 제주 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9연대의 진압 작전 참여를 명령했다. 딘 미군정장관은 맨스필드에게 공격에 임하기 전 소요집단 지도자와 접촉해 항복 기회를 주는 데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4월 28일 김익렬 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인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진행돼 72시간 내 전투 완전 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뤄지면 주모자 신병을 보장해 줄것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5월 1일 우익청년단원들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 미군이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 협상은 깨졌고 걷잡을 수 없는유혈 충돌로 치닫게 됐다.

이에 앞서 미24군단장이자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장군은 4월 27일 슈 중령을 제주로 파견해 귀순공작(평화협상)을 확인·감독하도록 하는 한편 미20연대 브라운 연대장을 통해 경비대와 경찰의 결속·무질서 종식을 지시했다.

딘 군정장관은 5월 5일 제주에서 군경 수뇌부들이 참석한 비밀회의를 가진 후 이튿날 사건의 배후로 (제주)도외에서 침입한 공산분자들을 지목하고, 경찰과 경비대의 노력으로 곧 회복될 것이라는 입장을 기자들에게 전했다.

무력위압과 선무공작 병용을 주장했던 김익렬 연대장은 해임됐고 후임에 박진경 중령이 임명됐다.

▲5·10 선거 무효화와 충돌=5월 10일 단독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거나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군정은 미군과 경비대, 경찰, 향보단까지 총동원해 선거를 독려했지만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등 2개 선거구는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화됐다.

미군정은 5월 20일께 광주에 주둔하던 미 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며 강경 진압 작전을 본격화했다.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8일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오른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됐다.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김달삼은 8월 25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석 차 월북, 이덕구가 무장대의 지휘 총책으로 나서게 됐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던 10월 17일 9연대장 송요찬 대령은 포고령을 통해 ‘군은 정부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 이외의 지점에 있는 사람은 폭도배로 인정해 총살하겠다’고 발표했고,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의 제주도 전역 계엄령 선포 후 대규모의 강경 진압 작전이 전개됐다. 1949년 2월까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하는 ‘초토화’가 이뤄졌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된 후 산악 소탕전과 선무공작 병용 작전으로 무장대 세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 후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 예비검속자와 형무소 수감자들이 희생됐다.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 7년 7개월 만에 불행한 역사는 막을 내렸다.

김재범 기자 kimjb@jejunews.co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