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주는 신병 양성 요람...피란 예술인과 문화 부흥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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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은 제주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 사진은 서귀포시 상효동 산간쯤으로 보이는 군부대 숙영지.<자료 제공=제주특별자치도>
제주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사건 발생에 이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의 발발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더욱 참혹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미국과 옛 소련이 38선을 그어 국토가 분단된 데 이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3년 1개월이나 이어지며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이뤄졌다. 동서로 250㎞의 휴전선이 그어지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남긴 것은 남·북한 사상지 230만명, 전쟁 미망인 20만명, 전쟁 고아 10만명, 폐허가 된 국토, 약 1000만명의 이산가족 등이다.

한국전쟁은 종전(終戰)이 아니라 정전휴전(停戰)상태로 지금도 이어지면서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제주사회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안전한 후방기지로 인식되면서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고, ‘귀신 잡는 해병’이 탄생했으며, 전쟁의 참화를 피해 제주로 피란온 문화예술인들로 인해 제주의 문화예술이 부흥하기도 했다.

▲육군 제1훈련소 설치=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22일 서귀포시 대정읍에 들어선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는 신병을 대규모로 양성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 1950년 7월 27일 모슬포 공군기지대가 창설돼 공군 간부를 양성해 공군 부대 창설의 기반이 됐고, 해병대는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를 설치해 해병 3·4기를 양성했다.

제주도는 육군·해병대·공군 등 3군의 정예 병력을 양성하는 군사교육훈련 기지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제주 4·3사건을 통해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힌 제주도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한반도의 운명을 구원하는 토대가 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전쟁 개전 초기 전체 육군의 총 병력은 9만6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된 병력은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만 5년 동안 50여 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문화재청은 광복 직후 한국군 창설 및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대 유적인 훈련소 지휘소를 2008년 등록문화재(409호)로 지정했다.

공군사관학교는 1951년 2월 1일부터 4월 23일까지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비록 80여 일의 짧은 기간임에도 장교 후보생 1000여 명을 이곳에서 배출했다.

이를 기념해 학교 교정에는 훈적비가 세워졌고, 주민들은 ‘보라매탑’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또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역사적인 군사 유적이 남아있다. 훈련소 병사 건물과 세면장, 사열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돼 등록문화재 410호로 지정됐다.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5월 제주 군·관·민 화합을 위해 춘계 종합체육대회를 개최하고 매년 대회를 개최해 제주 체육의 기틀을 닦았으며, 연병장은 1955년 제주시 공설운동장이 마련될 때까지 제주체육의 무대였다.

또 1952년 5월에는 육군 훈련소 정훈부 주최로 전도학생음악경연대회가 개최됐는데 이것이 최초의 전도 규모 음악 행사로 기록된다. 이후 군·경·학생 합동 음악회 및 합동 연주회와 더불어 훈련소 전속안단인 군예대(軍藝隊)의 공연이 자주 열려 제주 음악·예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군예대에는 유호, 박시춘, 황금심, 구봉서 등 연예인들이 동참했는데 박시춘은 군예대장을 맡아 활동하며 모슬포 바다를 배경으로 한 노래 ‘삼다도 소식’을 만들었다.

1952년 9월에는 강병대(强兵隊)교회가 설립돼 군인과 피란민들이 이용했다.

훈련소에는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장성들의 방문과 훈련 참관이 줄을 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 및 참전국 대표단이 수시로 모슬포를 찾았다.

▲귀신 잡는 해병 탄생=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380명으로 창설된 해병대는 같은 해 12월 제주로 이동했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해병대는 1950년 개전 직후 진동리 전투를 벌여 한국군에 첫 승리를 안겼으며, 이후 한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전투에서 승리해 외신으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해병대는 1950년 8월 제주 출신 학생으로 구성된 해병 3기와 4기를 제주농고와 모슬포에서 단기 훈련시킨 후 미해병 5연대와 함께 암호명 ‘크로마이트’로 불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했다. 해병 3·4기생에는 첫 여성 해병 126명이 포함됐다.

인천상륙작전에는 한국군 중 유일하게 제주 출신 해병으로 구성된 해병대가 참전해 미 해병과 함께 서울 탈환에 나섰다. 이때 참여한 해병대 병력 6000명 중 절반인 3000명이 제주 출신이다.

또 3·4기생이 주축이 된 해병대는 1951년 1월 동부전선에 투입돼 미 해병이 실패한 도솔산고지에서 전투를 벌여 2개 사단을 무너뜨리는 등 ‘무적 해병’의 전통을 세웠다.

당시 제주신보(현 제주일보)는 1950년 9월 기자 3명을 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작전에 종군기자로 파견하고 일선장병을 위한 방송용 행진곡과 가요 레코드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피란 예술인과 제주=제주에 온 수많은 피란민 가운데는 우리나라를 대표라는 문화예술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 가운데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소설가 계용묵은 1951년 봄부터 3년여 동안 제주시 삼도1동 제주극장 인근에 머물며 제주 문단을 이끌었다.

제주시 칠성로의 동백다방을 비롯해 제주시내 다방과 YMCA 강당, 우생당서점 등에서 시낭송회와 문학인의 밤 등의 행사가 열렸다.

1952년 5월 계용묵과 장수철, 최현식, 옥파일, 김묵, 임갑춘 등 피란 문인들과 제주 출신 양중해, 고영일, 정하은 등이 참여해 종합 교양지 ‘신문화’가 창간됐고, 이듬해 6월에는 제주도 최초의 순수문학 동인지인 ‘흑산호’가 발간됐다.

피란 예술인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학생들은 앞다퉈 교지 발간에 나섰으며, 당시 제주신보(현 제주일보)는 1951년 1월부터 지면에 ‘학생특집’란을 신설해 도내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선도했다.

이 시기 제주에 피란온 미술인들의 활동도 주목된다.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은 1951년 1월 가족을 데리고 입도, 서귀포에서 12월까지 머물며 작품활동에 매달렸다. 그는 이 시기 서귀포 바닷가의 게와 해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그리는가 하면 고마운 선주를 위해 여섯 폭의 병풍을 제작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51년 1월 입도한 홍종명은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칠성로에서 무료로 화가 지망생들을 가르치는가 하면, 이후 오현중·고교 교사로 재직하며 지역 미술 활성화에 기여했다.

해군 정훈부 선무공작대 요원으로 활동했던 장리석은 반공포스터를 제작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1951년 도내에서 첫 반공포스터 전시회가 개최됐다.

김창열은 제주읍에서 경찰관으로, 최덕휴는 훈련소 정훈대장으로, 최영림은 제주읍 해군문화부 부관으로 근무하면서도 화폭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음악 분야는 1951년 창설된 모슬포 제1훈련소에 군악대와 군예대가 조직되면서 활동이 두드러졌다.

1952년 유엔 민간협력단체 부사령관으로 부임한 미국인 길버트 소령은 1946년 조직된 제주중 관악대를 적극 지원하고 1953년 오현고의 관악대 설립에도 견인차 역할을 했다.

길버트 소령은 제주읍내 6개 관악대를 순회지도하고 지도교사들에게 지휘법을 지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피란 음악인으로는 계정식, 이성삼, 정삼모, 변훈, 이성재, 박재훈, 김재곤, 정남혁 등이 있는데 이들은 제1훈련소 부설 교회에서 합창단을 지휘하거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음악교육을 도왔다.

당시 제주제일중에서 같이 근무하던 양중해와 변훈은 가곡 ‘떠나가는 배’를 작사·작곡했다.

오현고 관악대는 1953년 11월 경남 진주에서 열린 제4회 영남예술제에 참가해 최고상을 차지했으며, 이듬해 오현고 주최 제1회 전도학생종합예술제가 탄생됐다.

1954년 11월 열린 전도학생종합예술제는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사진, 웅변, 수예 등 8개 부문에 걸쳐 진행된 도내 최초의 대규모 문화행사로 당시 각 분야의 학생예술을 종합적으로 한 자리에 모은 행사였다.

제주신보(현 제주일보)는 사흘간 관람인파가 8만여 명에 이른다며 도민들의 높은 관심을 연일 보도했다.

현봉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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