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자로 길이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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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누렇게 빛바랜 그 한 권의 책. 중학교 입학 때 얻었던 ‘영문법의 첫걸음’이라는 참고서를 잊지 못한다. 처음 공부하게 된 낯선 과목이 영어고, 그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꼭 봐야만 하는 책이라 여겼다.

‘첫걸음’이란 책 이름이 몹시 어린 나를 설레게 했다. 책의 첫걸음은 곧 중학생으로서의 첫출발을 의미했다. 입학식 날, 처음으로 교복 입고 등교하던 첫날의 가슴 두근거림, 말 그대로 감격이었다.

우리말에서 접두사 ‘첫’이 지니는 비중은 엄청나다.

중사전에 실린 ‘첫’으로 시작하는 어휘를 세니, 무려 여든 셋이었다. 다들 ‘처음, 최초, 시작, 효시, 애초, 진작’의 뜻을 지닌다. 파생어를 만드는 ‘첫’의 조어(造語) 기능은 그만큼 탁월하다.

태어날 때의 첫울음을 고고지성이라 한다.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 만큼 우렁차 사물이 처음으로 이룩되는 기척을 빗대기도 한다.

출산은 여인이 산고로 치르는 성스러운 탄생의례다. 아이를 낳은 후, 처음 떠먹는 미역국과 흰밥이 첫국밥이다.

갓난이로 처음 바깥세상에 나가는 것을 첫나들이라 한다. 아기 위로 내리는 상큼한 햇살과 볼 간질이는 명지바람에 철모르는 게 눈을 반짝일 것이다.

눈 내리는 아침, 수북이 쌓인 눈 위로 난 첫발자국의 주인은 누구일까. 어둑새벽에 찍은 것. 그것은 단순히 낭만이 아닌, 치열한 삶이 새긴 자국이다.

독에 담근 술이 익었을 때, 박아 놓은 용수에서 첫 번으로 떠내는 맑은 술을 첫국이라 한다. 한 사발 죽 들이켜는 막걸리와도 다른, 처음 뜬 술이라 한 모금이 값지다. 생각만 해도 꿀꺽 침이 목을 넘는다.

만남에 오래도록 남는 게 첫마디 말이다.

첫인상에 큰 영향을 끼칠 그 말. 소설이나 수필에서도 글의 첫머리가 중요하다. 작품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도입에서 탁 치고 들어가야 한다. 덜커덩 빗장 열리는 소리가 나게.

옛 어른들은 큰비만 안 오면 밭에 나갔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에 자란다지 않는가.

첫닭이 울 때를 기다린다. 밭을 떠나 살지 못하던 부지런을 하늘이 알아 햇빛과 우로(雨露)를 내려 풍년을 기약케 했다.

첫닭의 울음은 동살이 터 온다는 신호로 시계에 버금하지 않았다.

첫판에 승부를 내려는 건 좋은 상황인식이 아니다.

두세 번째 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흐름을 읽고 판단하는 주도면밀함과 집중력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 조급히 굴면 낭패 사기 십상이라 기다림의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도 한가지다. 힘을 탓할 건 아니나 과도해선 안된다. 힘의 안배와 인내가 성공으로 가는 그 길임을 알아야 한다. 첫판을 따낸 뒤의 패배는 쓰라리다. 경기에서 가장 뼈저린 게 역전패다.

새해 들어 시나브로 계절이 깊어 가고 있다. 모두 ‘첫’ 자로 길이 열린다.

어느새 유채꽃이 섬을 노랗게 입혀 채색 단장했고, 개나리도 울을 넘어 기웃거린다.

팝콘 터지듯 꽃 다퉈 피는 첫봄에 이어 첫여름, 첫가을, 첫겨울. 가는 세월 붙들지 못할망정 이즈음, 시간의 갑판에 올라 ‘배를 저어 가자 험한 바다 건너~’ 하고 첫출발에 희망의 노래라도 목청껏 불러 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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