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총에 턱을 맞은 무명천 할머니…악몽이 그녀를 지배했다.
(16) 총에 턱을 맞은 무명천 할머니…악몽이 그녀를 지배했다.
  • 홍의석 기자
  • 승인 2018.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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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픔의 상징 진아영 할머니.
고통 속에서 살다간 한스러운 삶

4·3 때 얼굴에 총탄을 맞아 한평생 턱 없이 살다가 고()진아영 할머니(1914~2004)는 평생 후유장애를 달고 살아야 했던 제주4·3사건의 생존 희생자였다.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닌다 해서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렸다.

진아영 할머니는 평생 하얀 천으로 감싼 채 죽기보다 힘든 고통 속에 살았다.

진아영 할머니는 4·3사건의 고통 속에서 한스러운 삶을 살다 간 끝나지 않은 아픔의 상징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19481011, 당시 이승만 정부는 4·3 토벌의 중심 부대로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새로 설치해 강력한 토벌정책을 펼쳤다.

19481117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탄압은 끝이 안보이지 않았다.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번져갔다.

특히 국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 시기였던 194812월과 19491, 2월의 잔인한 토벌로 많은 도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림 주둔 2연대와 한림지서 경찰들에 의한 판포리 토벌이 이뤄졌다.

한밤중 날아든 총탄에 바뀐 삶

진아영 할머니는 4·3 당시 고향 판포리의 오빠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순박하고 평범한 서른 다섯의 아낙이었다.

진아영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평범할 삶을 살던 할머니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제주도가 핏빛으로 물들던 19491월 판포리에 군경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진아영 할머니는 이들을 집 인근으로 몸을 피했지만 군경토벌대 총격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은 진아영 할머니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진아영 할머니는 아무 이유 없이 아래턱을 완전히 잃어, 죽기보다 힘든 삶을 살았다.

고통 속에서 살다간 한스러운 삶

진아영 할머니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됐다. 이후 언니와 사촌들이 살던 월령리로 이주했다.

진아영 할머니의 삶은 평생 트라우마가 지배했다.

진아영 할머니는 평생 정체 모를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악몽에 시달렸던 할머니는 모든 문마다 자물쇠를 달았고 문을 잠가야만 집 밖에 나설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남 앞에서 음식 먹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사람들 앞에서는 음식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진아영 할머니는 바닷가에서 톳을 캐다 팔고 이웃들의 농사를 도우며 약값을 벌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제대로 씹을 수 없던 진아영 할머니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위장병과 영양실조로 평생 고통 받았다.

결혼도 못 하고, 자식도 갖지 못한 진아영 할머니는 성이시돌 요양원에서 20049,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삶터는 몇 년간 방치됐다. 할머니의 삶을 잊지 않고 기리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모여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위원회를 만들어 한림읍 월령리 380번지에 위치한 할머니의 삶터를 정비했다.

두 칸짜리 작은집에는 진아영 할머니의 삶이 녹아있다.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승애 할머니(85·월령리)는 진아영 할머니의 외조카이다.

진아영 할머니가 주변 이웃들과 다툼이 있을 때면 김승애 할머니를 찾아 하소연하는 등 진아영 할머니의 삶을 가까운 데서 지켜봤다.

김승애 할머니는 진아영 할머니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진아영 할머니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턱이 없었던 탓에 말을 잘하지 못해 손짓발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김승애 할머니는 턱을 잃기 전 이모는 물질을 나갈 정도로 건강했다. 이모는 아무 잘못 없이 희생당했다그 당시에는 감히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냈다. 사건이 발생한지 딱 한 달 만에 물을 달라는 얘기를 했고 기적과 같이 회생했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와 진위현 삼촌의 도움으로 한 칸짜리 집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평생 외롭게 살다 가셨다씹을 수가 없어서 주로 죽을 쒀서 끼니를 때웠다.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 혼자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제대로 말할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이모는 그 날의 공포를 지고 평생을 살아왔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집에 자물쇠가 유난히 많았는데 집을 나설때에는 항상 문을 잠그고 나왔다.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김 할머니는 지금은 나도 나이 들어 자식들이 이모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이모가 이시돌 양로원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데 제주 4·3 평화공원으로 이장됐으면 좋겠다. 무명천에 갇혀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간 이모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