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생(生), 한순간 존재하는 이슬 같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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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 존재의 본질과 구원의 문제를 파노라마 형식으로 표현한 고갱의 역작이다.
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 존재의 본질과 구원의 문제를 파노라마 형식으로 표현한 고갱의 역작이다.

저승, 북망산과 미지의 세계

저승의 다른 말로 북망산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의 유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합장을 했다.

전란(戰亂)이 많은 까닭에 전쟁을 하다가 패해 집단으로 몰사하는 경우가 많아 한꺼번에 합장을 한 것이다.

지금의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에는 한()나라 때 조정이 있었으므로 이 낙양성에서 멀리 북망산이 바라다보였다.

장지(葬地)는 대개 낙양성 동문에 있었는 데 이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낙양성 동쪽에는 문이 셋 있는데 그 하나가 상동문(上東門)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것이 북망산인데 동한(東漢)과 위진(魏晉) 때 모두 이곳에 죽은 사람을 묻었다.

동한(東漢) 때 지은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에서는 다음의 시처럼 일찍부터 북망산이 죽은 자들의 황천(黃泉:저승)으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낙양성 동문에 올라 멀리 북망산을 바라보노라.

백양나무 쓸쓸히 서 있고,

넓은 길에는 소나무 측백나무 빽빽이 늘어섰다.

아래에는 죽은 사람 줄줄이 누워있고,

깜깜한 땅 속은 영원히 어둠이어라.

황천에서 한번 잠들면,

천년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한다.

사계절은 쉬지 않고 흐르건만,

사람의 목숨 아침 이슬과 같구나.

인생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

목숨은 금석(金石)처럼 단단하지가 않다.’

(……)

 

인류의 출현 이후 21세기 지금까지, 남에게든 자신에게든 끊임없이 묻고 되 물은 존재와 죽음의 비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물음은 분명 시지프스(그리스신화 인물)의 형벌에 다름 아니다.

17세기 독일의 시인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는 인간 존재의 시원(始原)과 종점(終點)을 알지 못하는 의문을 다음의 시로 전하고 있다.

 

나는 존재하나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왔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가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유쾌하게 산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독일의 신학자 한스 퀑(Hans Küng, 1928~ )도 스스로에게 질레지우스 같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다음처럼 던졌다.

누가 나를 이 세상에 생겨나게 했는지

세계는 그리고 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나는 만사에 대하여 끔찍한 무지 속에 있다.

나는 나의 육체, 나의 감각, 나의 정신이 무엇인

지 모르거니와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 그리고 자

신에 대하여 성찰하는, 그러나 기타의 것은 물론

자기 스스로도 모르는 내가 무엇인지 모른다.’

(……)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오직 무한일 뿐이며

이 무한은 다시는 돌아올 길 없이 한순간 지속

될 뿐인 하나의 원자, 하나의 그림자와도 같은

나를 덮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 그 자체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

 

존재의 고뇌를 생각나게 하는 제주 동자석.
존재의 고뇌를 생각나게 하는 제주 동자석.

고갱과 도연명

질레지우스와 한스 퀑의 인생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다시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Paul Gauguin, 1848~1903)으로 이어진다. 고갱은 자본주의 문명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그림의 에너지를 갈구해 강렬한 삶의 변화를 꿈꾸며 원시의 섬 타히티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고자 했다.

고갱은 거기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고뇌 속에서 남은 생명을 다해 밤낮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인생에 대한 탄생, , 죽음이라는 3부로 이루어진 그 대작은 고갱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덧없음의 시선이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삶을 철학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었다.

도연명(陶淵明, 363~427)은 소동파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으로, 이백이나 두보도 도연명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 시인으로, 자연과 한 몸이 되고자 했던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輓歌) 3를 지었는데, ‘만가 1는 죽은 후 시신을 염하는 장면, ‘만가 2는 친구들이 자신을 발인하는 장면, ‘만가 3는 들판에 자신을 매장하는 장면이다.

만가 1수에태어나면 반드시 죽기 마련, 빨리 가는 것도 제 운명이어라/ 엊저녁에는 같은 사람이었으나, 오늘 아침엔 명부(冥府)에 이름 있더라/ 혼백의 기운은 흩어져 어디로 가나, 굳은 몸은 텅 빈 관 속에 드네/ 아이들은 아버지 찾아 울고 벗들은 나를 어름 쓸며 통곡하네/ 이제는 다시 득실을 따지지 않고, 시비도 아는 척하지 않노라/ 천 년 만 년 후에는 누구도, 잘 살았다 못 살았다 알지 못하리/ 오직 살아생전의 한은 마냥 술을 마시지 못한 것일 뿐이네’.

만가 2수에, ‘무덤은 한번 닫혀버리면/ 천년이 흘러도 다시 아침은 없으리니/ 현달한 사람도 어쩔 수 없구나,/ 앞서 나를 보내려 왔던 사람들/ 각자 집으로 돌아가네./ 친척들은 혹여 슬픔 남겠으나/ 다른 이들은 벌써 노래 부르겠네./ 죽고 가버리니 무엇을 말하리오/ 몸 산천에 맡기니 하나 될 것이네’.

만가 3수에, ‘전에는 높은 집에 누워 잤으나, 이제는 황폐한 풀밭에 묻혔노라/ 일단 죽어 이승에서 나가면, 끝없는 밤 어둠 속으로 가노라’.

예기(禮記에서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이를 귀신이라고 한다. 또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죽으면,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본성이며, 혼기(魂氣)는 안 가는 곳이 없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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