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이어 축적한 가풍…집안 흥망성쇠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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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변씨, 애월읍 상가리·납읍리 정착…7명 문·무과 합격 전성기
변희로 아들·손자들 잇따라 과거 급제…가문 융성·후학 양성 힘써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에 있는 암벽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은 중국의 대학자인 증자와 주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공경하게 대하라는 뜻으로 송시열이 쓴 글씨다. 오현단에 있는 글자는 송시열이 성균관의 석벽에 쓴 것을 변성우가 사본으로 만들어 집자한 것이다.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에 있는 암벽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은 중국의 대학자인 증자와 주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공경하게 대하라는 뜻으로 송시열이 쓴 글씨다. 오현단에 있는 글자는 송시열이 성균관의 석벽에 쓴 것을 변성우가 사본으로 만들어 집자한 것이다.

모든 분야에 전통이 있듯이 학문에도 학풍이 있고, 집안에도 가풍이 있다.

좋은 가풍은 한 번 만들기가 어렵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훌륭한 가풍은 일정 기간 그 집안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좋은 가풍과 전통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제주에 정착한 원주변씨 가문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원주변씨의 시조는 변안렬(邊安烈, 1334~1390)로 알려졌다. 변안렬의 자는 충가(忠可)이고 호는 대은(大隱)이다.

고려 말기에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와 정착했다. 그는 이성계와 함께 황산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등 공을 세웠지만, 우왕의 복위를 모의했던 일에 연루돼 사형됐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선 개국 후 변안렬을 개국 이등공신에 올리고 벼슬을 추증했다.

제주 입도조는 변안열의 3세손 변세청(邊世淸)이다. 변세청은 조선 개국 후 혼란이 계속되자 1405년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제주로 피신해 현재 제주시 노형동 근처에 정착했다.

변안열의 3남 변예(邊預)의 아들인 변세청에서 시작된 제주 후손들은 중랑장계로 부른다.

원주변씨는 제주에 들어온 후 노형동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꾸준히 삶의 터전을 넓혀 갔다. 그 이후 애월읍 상가리와 납읍리 일대에 정착했고, 영조대에 이르러 7명의 후손이 문과와 무과에 잇따라 합격하면서 전성기를 이뤘다.

조선왕조실록의 변시중 급제 기록.
조선왕조실록의 변시중 급제 기록.

그 첫 문을 연 이가 변시중(邊是重)이다. 변시중은 자가 중여(重如). 1694년 애월읍 납읍리에서 변희로(邊希蘆)의 아들로 태어나 35세인 1728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급제 후에 예조좌랑과 전라도 흥덕현감을 지냈고 말년에는 제주 귤림서원 훈장이 돼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런 가풍이 축적된 결과인지 1765년 실시된 과거에서 변시중의 조카 3형제가 같은 날 나란히 급제했다. 변성운(邊聖運)과 변성우(邊聖遇)는 문과에, 변성보(邊聖輔)는 무과에 급제했다.

변성우는 자가 회숙(會叔)으로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주서, 성균관전적, 삼례찰방 등을 지냈다. 그는 오현단에 있는 증주벽립(曾朱壁立 : 앞에 증자와 주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공경하게 대하라)’이라 쓰인 석벽의 글자를 집자(集字·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서 모음)한 것으로 지역 사회에 널리 알려진다. 원래 이 글자는 송시열이 성균관의 석벽에 쓴 것을 그가 사본으로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국조방목(한국학중앙연구원)의 변성운 문과 급제 기록.
국조방목(한국학중앙연구원)의 변성운 문과 급제 기록.

변성운은 자가 중휴(仲休)로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에 이르렀다. 변성보는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이어 1783년에는 변희로의 증손이자 변성보의 아들인 변경우(邊景祐, 17451836)가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숭정3계묘증광별시문무과전시방목(崇禎三癸卯增廣別試文武科殿試榜目)’에는 변경우의 자가 문보(文甫)로 돼 있다.

그는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흉년으로 고생하는 제주민을 구휼하기 위해 곡물 창고를 지어 곡식을 대여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해 허락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공으로 1805년 정조대왕의 모후인 혜경궁의 탄생일을 맞아, 61세가 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때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을유식년문무과방목(국립중앙도서관)의 변성보 무과 급제 기록.
을유식년문무과방목(국립중앙도서관)의 변성보 무과 급제 기록.

일단 융성한 가문은 쉽게 사그러지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듯 12년 후인 1795년에 변경붕(邊景鵬)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고조부인 변희련(邊希蓮)의 돌림자가 ()’인 것으로 보아 변희로와 같은 항렬의 형제 관계로 추정된다. 그리고 변경붕의 거주지가 대정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대정 인근으로 이주한 원주변씨의 일파로 보인다.

그의 과거 급제는 또 다른 관례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당시 다른 지방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이름과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 반포하고 대대손손 보관하는 관례가 있었지만 제주에는 이런 예가 없었다. 이에 정조 임금은 변경붕이 급제한 때에 탐라빈흥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배포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따라 풍패빈흥록’, ‘관북빈흥록’, ‘관서빈흥록등이 연이어 간행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변경붕은 경기도 양주의 연서찰방으로 재임 중에 국가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다섯 가지 정책과제를 올렸고 순조 임금은 이를 채택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만경현령, 대정현감 등을 지냈고, 말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대정향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 이후 변성보의 아들 변경준(邊景俊)1815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변경준은 승정원주서와 성균관학유, 봉상시봉사 등을 역임했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애월읍 상가리의 서학당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이 서학당은 당시 제주목사 한응호(韓應浩)가 설립했는데 변경준이 상가리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교육할 수 있도록 이곳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서학당은 제주 서쪽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 시설 역할을 하였다.

가풍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여러 대에 걸쳐 합심하고 노력한 결과가 축적된 것이 때가 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좋은 집안의 전통을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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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창진(梁彰珍)은…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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