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해녀' 바버라 해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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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해머(68) 감독은 여성영화의 대모이자 퀴어영화의 선구자다. 또 여성과 동성애자의 인권을 위해 뛰어 온 활동가이기도 하다.

레즈비언 감독이 레즈비언 영화를 만든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질산염 키스'(1992)에서 '바비의 수업'(1995), '역사수업'(2000)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통해 동성애자의 진짜 역사를 되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10일 개막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았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살고 있는 그가 서울에 들고 온 작품은 다름 아닌 다큐멘터리 '제주도 해녀'다.

이 영화는 구성진 노랫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검은 잠수복을 입은 해녀가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해녀가 물에서 빠져나오면서 물안경 사이로 깊게 주름진 얼굴이 보이고 뭍에 있는 사람들은 해녀에게 "수고했수다"란 인사를 건넨다.

"해녀는 정말 독특한 여성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고 일에 헌신적이며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어 부를 만큼 창의적입니다. 또 엄마가 딸에게 문화를 전해주고 직업을 물려줍니다. 모녀간의 유대는 중요한 주제이죠. 다른 나라엔 없는 이 특별한 여성 문화를 탐구해 보고 싶었습니다."
여성인권을 위해 투신해 온 해머 감독이 지구상에서 오로지 한 곳,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전문직 여성인 해녀를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한 건 이렇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2001년 '역사수업'으로 여성영화제에 참석한 그에게 이혜경 당시 집행위원장이 한국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물었고, 항공기내 책자에서 본 제주 해녀에 관한 글을 떠올린 그는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답했다. 바로 다음날 그는 제주도로 향했고 촬영은 5일 만에 마무리됐다.

그는 "제주도에 보내준 게 여성영화제이니 프리미어(첫 공개)를 여기에서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며 "이번 상영은 내게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한국 관객의 반응이 매우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카메라에 담긴 해녀들의 모습은 한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계획 없이 찍었던 이 영화보다 먼저 '저항 없는 파라다이스'(2003)와 '연인, 타인'(2005)을 완성했다. 이 작업을 끝내자마자 그는 암 3기 진단을 받았고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죠. 수술과 화학치료를 받는 건 정말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잘 버텼고 1년 반 전 완치됐습니다. 위중한 병을 앓고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희망에 대해 생각했죠. 그래서 '말은 은유가 아니다'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말은 에너지가 넘치는 동물이니까 열정과 자유로움에 대해 얘기할 때 말에 비유하곤 했거든요."
건강을 회복한 '제주도 해녀'의 필름이 그대로 잠만 자고 있는 것은 촬영을 도운 한국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영화를 완성하게 된다.

30년간 80편 이상의 작품을 만든 그는 과감하고 실험적인 기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담아 왔다. 그러나 '제주도 해녀'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담담하다. 그는 해녀들이 일하고, 노래하고, 살아 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어떤 효과도 덧입히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직접 해설자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동안은 내가 잘 아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 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죠. 하지만 해녀들은 제게 이방인이고, 저 역시 그분들에게는 이방인입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 영화를 찍으면서 조금씩 알아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내레이션도 할 수 없었죠. 제 작업은 해녀들을 위한 아주 작은 노력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자신의 삶과 터전을 온전히 지켜 온 제주 해녀들에 대한 감독의 경의 표시였던 셈이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해녀 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번에 서울행 비행기내 책자에서 제주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어요.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는 거였죠. 그런데 이런 지리적 장소뿐 아니라 해녀도 유산으로 등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영화에는 제주 4.3사건에 대한 언급이 상당한 분량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 그는 "여자가 앞에 서고 남자가 뒤에 있는 이 시위는 해녀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데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미군정 아래에서 일어난 민간인 대량 학살에 대해 처음 알게 됐고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고요.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전쟁은 정부가 일으킨 것이고 정부는 사람들이 뽑은 것이니 결국 전쟁은 사람들의 책임인 거죠."
그가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 '말은 은유가 아니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전망이다. 그는 이제 감독의 자리에서 그만 은퇴할 생각이라고 했다.

"레즈비언의 성애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건 제가 처음이었고 레즈비언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한 것도 처음이었죠. 제가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레즈비언 영화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성 감독들은 이미 정체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체성 확립 이후의 유동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죠."
이제껏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한 실천과 행동을 해왔으면서도 "이제는 정말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아름다움과 열정 그 자체였다.

"저는 이제 '공상적(visionary)'이기보다 '활동적(actionary)'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성별, 나이, 피부색에 관계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위해 계속 활동할 겁니다."(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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