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 익어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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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 시인·수필가·아동문학가

뒤꼍엔 두 세대의 삶을 살아온 토종 감나무가 초가지붕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지에 알몸으로 주렁주렁 서 있는 저 붉게 익어가는 감. 뜨거운 하늘에서 멱을 감았지. 그냥 보기만 해도 탐스럽고 군침이 돈다. 소싯적 고향의 외할머니 댁 뒤꼍을 지키고 있는 감나무다.

오늘은 여름 조밭 김매기를 쉴 참인 것 같다. 할아버지는 외양간으로 가시더니, 긴 막대기를 꺼내신다. ‘Y’자 모양의 긴 막대기가 가지와 가지 사이를 오가더니, 뚝 뚝 뚝 떨어진다. 손자는 바지런히 망태기에 주어 담는다. 싱그러운 풋감, 단단하고 싱싱하다. 꼭지를 떼어낸 풋감은 칼로 네 조각내어 절구통에 넣어 으깬다. 감물이 빠진다. 미리 준비해 놓은 하얀 광목을 펼쳐놓는다. 광목에 완전히 감물이 스며들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옷감을 마주잡고 당긴다. 그리고는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 잘 드는 곳에 멍석을 깔아놓기도 한다. 물을 축여가며 여러 차례 손질을 거치는 동안 감물은 발색하면서 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입기 편하고 땀이 배지 않는 갈중이(노동복)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감은 여름이 갈 무렵이면 하루하루 몸집 불리기에 속도를 내고 떫은맛인 탄닌 성분이 산화되면서 단맛을 만들어낸다. 다른 먹을 것이 흔치 않았던 시대였다. 벌레가 먹었거나 바람에 서로 부딪쳐 상처 입은 것들은 먼저 불그레해졌다. 그런 것들은 먼저 떨어진다. ‘떨어진 감을 주우러 동네 조무래기들이 기웃 거릴 때면 다음에도 또 오거라하시면서 배려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셨다. 아이들은 단맛이 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떫지는 않은 표정들이었다.

운동회의 계절 가을이다. 만국기가 흩날리고 어린이 행진곡 소리가 운동장 밖으로 멀리 멀리 퍼져 나간다. 공 던지기. . 백군 달리기. 기마전, 장애물 경주. 해바라기를 닮은 아이들이 오전 경기가 마치고 나면, 점심시간을 맞는다. 운동장 주변에는 좌판을 벌여놓은 잡상인들이 제 각기 목청을 돋우며 먹 거리와 물건을 파는데 열 올린다. 운동회 때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고구마와 감을 갖고 오셨다. 역시나 했더니, 역시다. 갖고 오실 것을 예상했던 대로 갖고 오셨으니까.

한 방울 한 방울 먹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몰랐다. 어릴 적엔 그랬다. ‘운동회는 감 먹는 날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집 뒤란에 서 있는 감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열매를 맺어 시간이 흐를수록 붉게 익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내 생애도 저처럼 풍요롭게 익어가는 삶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과욕일까.

이 가을엔 즐겁고 아름다운 합창소리를 내는 새들을 위해 넉넉하게 맛있는 먹잇감을 남겨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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