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일보
  • 승인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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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끝은 시·공간의 마지막이다. 순간순간 끝이 있고, 하루 한 달 한 해에도 끝이 있다. 시계를 보는 것은 정해진 시간의 끝을 보려는 것이고, 흐름 속에서 제자리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끝을 엄중히 하는 것은 규제면서 절도다. 걷는 길에도 끝이 있다. 이를테면 버스가 가 닿고 배가 접안해야 할 곳엔 터미널이 있고, 비행기가 착륙해야 할 끝에 공항이 있다. 모두 종착지다.

봄이 여름으로, 여름이 그 끝에 잇대어 가을이, 가을이 마지막으로 내려앉은 지점에 겨울이 입성한다. 생명에게 계절의 끝은 그 한때의 마지막 공간이면서, 끝의 뒤로 이어지는 생장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잎 진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마지막 잎이 삭풍에 사그락대는 정경처럼 을씨년스러운 것이 없다. 왜 견뎌야 하는가. 꽃단풍이나 상수리나무 마른 잎이 겨우내 나뭇가지에 붙어 찬 바람 앞에 바스락거리는 것은 왠지 청승맞다. 가을이 끝으로 기울 무렵, 질 때를 알아서 지는 잎이 낙엽이다. 잎이 단풍으로 물드는 연유를 알아야 한다. 낙엽으로 끝을 마무리하기 위해 단풍으로 치장할 수밖에 없다. 태어난 근본을 두껍게 덮어 부엽토가 되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은 잎의 끝으로 우주의 섭리다.

끝은 꼭대기다. 산꼭대기는 산의 끝이다. 해발고도, 산의 끝자락이다. 등산은 산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이다. 오르다 산을 등지고 내려오면 등산을 완성하지 못한다. 힘들어도 가파른 길을 넘어야 끝에 이르는, 그게 정복이다. 산의 끝, 꼭대기에 두 다리를 딛지 않고 산을 말할 수 없다.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전망 혹은 누구의 앞날을 말할 때, 끝을 보고 말하자 한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않았는데 예단은 이르다는 것이고, 될성부른데 더 지켜봐야지 지금이 과업 수행을 섣불리 평가할 계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끝을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것, 그때 객관적 잣대를 들이대도 늦지 않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끝을 보고 말하는 게 백번 옳다. 차례를 기다릴 때도 매번 끝을 경험하게 된다. 줄 서 있는 사람들 맨 마지막이니까 끝이다.

시종여일(始終如一)이라 한다. 시작과 끝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 앞으로 내려오는 게 고진감래(苦盡甘來)다. 쓴 것이 다해야 단 것이 온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다. ‘고진감래’의 ‘盡’, 다한 뒤의 끝이다.

어떤 난리나 사태에도 종말이 있다. 끝이다. 피 흘리던 전쟁도 끝이 있고 고통받던 재앙도 끝이 있다. 코로나19가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고 3차 대유행으로 가고 있다. 희고 검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거리, 전엔 못 보던 희한한 풍경이다. 가면 쓴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상한 도시 같아 소름 끼칠 때가 있다. 비대면만이 삶이고 일상이 돼 버린 낯선 생활양식 속에 갇혀 사는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종말은 반드시 있다. 분명 코로나19 사태도 끝이 온다. 어떻게 앞당기느냐가 요체다. 오랫동안 겪어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지만 기다려야 한다. 방역수칙만 제대로 준수해도 질병 없는 세상이 온다. 백신 개발도 몇 달 후로 가시화됐다잖은가.

마을 길을 걷다 놀랐다. 어느 집 낮은 울담에 늙은 호박 예닐곱 개가 매달려 있다. 잎은 누렇게 시들었는데 굵직한 줄기 하나가 그 많은 호박을 끌어안고 여름내 견뎌왔다니. 생애의 끝이 아름다웠다. 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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