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일본 유학 중 민족주의에 눈 떠…반일 운동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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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덕환, 오사카 전협 항일 활동
 부동흥,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부만근, 前 제주대병원 이사장
 부병각, 조천 만세 운동에 참여
 부병준,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부병준의 고향인 조천읍 북촌리 포구 ‘뒷개’의 1970년대 모습. 부병준은 ‘학생전위동맹’, ‘혁명적 농민조합준비위원회’ 등에서 항일 활동을 한 공로로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부병준의 고향인 조천읍 북촌리 포구 ‘뒷개’의 1970년대 모습. 부병준은 ‘학생전위동맹’, ‘혁명적 농민조합준비위원회’ 등에서 항일 활동을 한 공로로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부덕환夫德煥:1908(융희2)~1944(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전협(全協) 항일 활동, 정부에서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 본관 제주.

부병익(夫秉益)과 어머니 김종윤(金鍾允)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역시 항일 활동으로 투옥된 바 있는 부장환(夫章煥)의 친형이다. 

1933년 3월 29일 검거됐다. 동년 8월 기소됐고 1934년 6월 18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이 선고돼 옥고를 치렀다. 

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피혁공(皮革工)으로 노동에 종사하면서 1931년 6월, 전협 화학 노조 오사카지부에 가입했다. 또, 1932년 7월 구로주미(黑住剛·일본인)의 권유로 공청(共靑)에 가입해 그의 지도하에 남(南)지구원으로 활동하던 중이었다. 

 

 

 

 

▲부동흥夫東興:1927(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학생 항일 활동, 조국 광복 후 ‘신흥무진주식회사’ 사장 역임,  1995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 본관 제주.

부자도(夫子道)의 6남 7녀 중 둘째아들로 산북 구좌읍 동복리 160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2년 7월 일본 오사카의 사립 동아전기통신공업학교 제2학년에 재학 중에 한국 출신 학생 중야길웅(中野吉雄·경남 동래), 삼산주식(杉山周植·경남 합천) 등 민족의식이 강렬한 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오사카와 히로시마(廣島)지역의 한국인 학우를 동지로 규합, 이들과 자주 회합을 갖고 일본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 시기에 조선은 독립 쟁취를 위해 봉기하여야 한다’, ‘만주(滿洲)에 본부를 설치하여 독립국민군을 편성한다’, ‘만주를 조선의 영토로 한다’, ‘이왕가(李王家)는 매국의 책임자로 처단하고 공화국으로 독립을 실현한다’는 네 가지 기본 계획을 수립했다. 

제주지역 진출 후 탈출 경로 탐색 등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시 제주도로 귀향했다. 귀국 후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의식 계몽 활동 등을 벌이던 도중 1943년 11월 25일 체포돼 1944년 6월 3일 오오사카(大阪)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돼 옥고를 치렀다.

 

 

▲부만근夫萬根:1941~현재.

제주대학교 법학과와 건국대학교대학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에서 행정학박사학위를 일본 류큐(琉球)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신문사 기자를 거쳐 제주대학교의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기획연구실장, 법정대학장, 행정대학원장, 총장 겸 제주대학교병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정년퇴임하면서 정부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사회 활동으로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국지방자치학회 부회장, 21세기국토포럼 공동대표,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전국 시‧도혁신협의회 의장단회장, 대한민국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부병각夫秉恪:1898(광무2)~1963, 본관 제주.

부달현(夫達鉉)의 장남으로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기미년 조천 만세 운동 당시 항일 활동으로 체포돼 동년 4월 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칙령(勅令) 제7호(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부병준夫丙準:1906(광무10)~1950(분단시대), 가명 부건(夫鍵), 호는 백도, 광복 후 민전(民戰) 일본 지부 가입, 본관 제주.

서울에서의 학생 전위동맹(前衛同盟)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의 항일 활동을 했다.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한학자 부정규(夫正奎)의 3남으로 조천읍 북촌리 ‘뒷-개’에서 태어났다. 항일 운동가 부기준(夫己準)의 형이다. 큰 형 성준과 둘째 형 봉준은 한학을 했으며 동생 기준은 배제고보를 다녔다.

 11세 때 김녕리의 한월계(韓月桂)와 결혼했으나 신식교육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1923년 3월 화북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중퇴했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 민족주의에 눈을 떠 1년 후 서울로 돌아와 1928년 3월 조선 청년총동맹 중앙청년동맹의 서무부원으로, 또 학생부를 담당했고, 동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뽑혔다.

이후 휘문(徽文), 배재(培材), 중앙학교의 야체이카를 조직하게 하고 서울에서 반일(反日)운동을 확산했다.

한편 학생전위대의 김순희(金淳熙·중앙고보 4년, 남원리), 송건호(宋健鎬·양정고보 4년, 함덕) 등의 항일 운동에 연관돼 구금됐으나 송건호는 면소(免訴), 부병준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운동의 호기로 보고 중앙 청년동맹에서 파견돼 진상 조사위원으로 현지에 내려와 맹휴(盟休)를 지휘했다.

이로써 광주경찰서에 검거되고 193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면소로 풀려나자 귀향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1933년 2월 상순 김일준(金日準)의 권유로 비밀 결사인 ‘신좌(新左)면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해 김일준이 책임자가 되고 그는 고향 북촌, 구좌면 동복, 김녕, 월정 지구를 담당해 월정리의 신창진(愼昌珍)을 동지로 맞이했다.

1933년 7월 함덕리 산업조합 사무소에서 부생종·김원근 등과 함께 3인이 모여서 김일준의 사회로 해안에 등대를 설치해 야간 항해의 편의를 도모함으로써 어민을 산하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일동이 쾌히 승낙하므로 그 시설을 김원근에 일임해 이를 설치했다.

한편, 그는 부생종과 함께 향동회(鄕同會)·민풍진흥회 결성을 주도하고 1933년 3월 독서회를 조직, 또 야학소를 개설해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특히 민풍진홍회와 향동회 같은 농민 집단에 들어가 그들의 의견을 듣고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동지 획득을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독서회 지도에도 주안점을 두었다.

이와 같이 한림면, 조천면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1934년 10월 제주경찰서에 의해서 62명이 입건되고 52명이 검거됐다.

고문에 의해 1명이 사망하고 35명은 기소 유예처분, 10명은 소재불명으로 기소 중지되고 부병준 등 16명만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로써 그는 1934년 8월에 검거돼 1937년 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복역 후 일본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며 전전하던 중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여 서울로 옮겨 충무로에 있는 제주문화협회 재일 교포 연락 사무의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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