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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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해남 고산(孤山) 유적지에 ‘녹우당’이라는 윤 씨 고택(古宅)이 있다. 효종이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 일부를 옮겨 사랑채로 만든 것이다. 작명엔 유래가 있다. 집 뒤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는 ‘쏴~아’ 하는 소리가 비가 내리는 듯하다 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바람 소리를 비라 한 데다 ‘녹우(綠雨)’라 초록 물을 들였다.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빗소리 같다 했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시조의 대가다운 감성이 부슬부슬 초록 비로 내렸다.

선조들에겐 초록 취향이 있었다. 혼례를 치른 신부가 어르신들 앞에 수줍게 나앉을 때 입던 옷이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연두저고리 다홍치마였다. 비단, 백년가약으로 설레는 신부에 그치지 않고, 젊은 여인이 맵시를 뽐냄에 보편화된 옷차림이었다. 받쳐 입는 다홍치마와 조화 무비(無比)로 아름다운 옷매무새를 극치에 이르게 한 게 단연 연두저고리였다. 녹의홍상이란 사자성어로 그냥 굳어진 것이 아니다.

봄 하늘이나 바닷물을 에메랄드라 한다. 봄엔 바다와 하늘이 그 빛이라 투명하다. 에메랄드는 귀한 보석으로 변하지 않는 매혹의 취옥(翠玉)이다. 김영랑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서 노래한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의 ‘에메랄드’는 낮게 드리운 봄 하늘을 슬그머니 시각화했다. 보드레한 연둣빛이라 했으니 얼마나 감각적인가. 언어를 쪼아 세공한들 하늘을 이보다 더 명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초록은 아이들이 즐겨 부르던 동요 <초록 바다>에도 나온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초록은 자라는 아이들의 낯빛이고 평화와 희망의 색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의 주체는 아이이고, 그럼으로써 파란 하늘빛 물이 든다고 노래한다. 어른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이야말로 티끌 한 톨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동심이라 가능한 세계다.

녹색 깃털로 덮인 동박새는 동백나무에 깃을 튼다. 동백꽃의 꿀을 좋아해 동백나무 가지에 내리는 동박새. 겨우내 움츠렸던 동백이 감았던 붕대 풀 듯 발간 속살을 펼쳐놓는다. 소유와 누림을 말해 무엇하리. 소유는 잡고 사는 삶이고, 누림은 끌어안고 사는 삶일진댄, 견주어 만족이 더하고 덜하다 하랴. 때맞춰 말없이 꽃을 피우는 동백, 꽃을 수정시킨 값으로 꿀을 빨아 먹는 동박새. 공생하는 것일 뿐, 주고받을 뿐, 누가 존재이고 누군 누림인지, 누가 소유이고 누군 욕망의 충족인가. 견주어 분간할 건 또 무언가.

식물은 엽록소가 있어 초록이다. 초록이라야 하는 이유가 있다. 빛 에너지를 유기화합물 합성을 통해 화학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광합성 작용을 위해서다. 강렬한 햇볕 아래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에너지를 흡수해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로 바꿔 놓는다. 나무가 먹고 자랄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한여름 태양 아래 나무들은 광합성으로 격렬하다. 연둣빛이 어느새 진초록이 돼 있다. 세상이 초록 일색, 왕성한 광합성으로 하루 이틀이 다르게 성장해 숲이 된다. 그래도 땀이 나지 않는 나무들, 초록이 끝물에 이르러 잎이 시들면 꽃 진 자리로 열매를 맺는다. 여름의 초록은 열매를 위한 것이었다. 릴케는 <가을날>에서 이를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고 예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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