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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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눈앞이 흐릿하다. 책은 돋보기라야 들어온다. 안경알을 교체했더니 잘 보인다. 안경 너머 세상, 훤히 들여다보지 못한 주변사 하나를 톺아보게 된다.

뇌경색, 뜻밖이었다. 무단침입한 불청객과 한참 담판 중이다. 일방적 동거가 아홉 달째다. 아무리 박대해도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고비는 넘겼으나 어지럼증과 발음장애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어지럽고 말을 더듬댈 때는 사고작용까지 주춤거린다. 운동도 아파트를 내려와 흙을 밟는 정도다. 다 멈출 수는 없으니 두뇌활동으로 글 몇 줄 쓰며 약물치료에 집중하라는 의사의 소견이다.

코로나19 시국에 노 수필가 M이 과수원에서 강황(薑黃) 뿌리를 파고 가져오셨다. 뇌세포를 활성화해 준다는 생강 모양의 뿌리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시킨 대로 가루로 빻아 먹어야겠다.

친구 L이 전화로, 문자로 안부를 물어왔다. 두어 번 통화했지만 말이 불편해 뒤가 스산하다. 한번은 며칠 전 그를 도심의 숲 그늘에서 만났다. 얘기 중에 화장지를 꺼내 눈시울을 훔치고 있다. 우정이란 이런 것인가. 같이 해오던 문학동인 을 내려놓겠다고 말하는데 몹시 가슴이 떨렸다. 나만 생각한다고 욕할지라도 몸의 안정을 우선해야 할 지경이 됐다.

동생 같은 수필가 Y가 야산 나무에 매달려 구지뽕을 따다 조청 속에 넣고 왔다. 뇌 활동을 촉진시킨단다. 가지에 돋아난 가시를 무릅쓰고 구지뽕을 따 온 초로의 사나이는 나에게 무엇인가. 또 그의 부인은 줄줄 땀 흘리며 곤 조청에 구지뽕을 여러 그릇 시울이 넘게 담아왔다. 넉 달을 아침마다 한 술씩 떠먹었으니 내 몸을 위해 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수필동아리 동인 회장에게 전화로 동인을 내려놓겠다는 뜻을 전했다. 내 발기로 탄생한 지 14, 작년 동인지 ’14집을 냈다. 그동안 치열하게 연단(鍊鍛)한 회원들 문학적 역량이 절정에 이르게 성숙했으니 큰 아쉬움은 없다. 문학은 종국에 혼자 하는 것이다. 가족처럼 정든 회원들과의 작별이라 동인 면면을 떠올리며 혼자 씁쓸히 웃는다. 코로나19로 대면치 못한 채 돌아서며 먼 산에 눈을 보낸다.

20년 가까이 강의해 온 글사모를 그만두려니 울컥해 온다. 말이 어려워 강의 진행은 무리다. 또 그런 모습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사회복지법인 춘강산하라 담당자에게 알렸다. 그런데도 엊그저께, 회장이 비대면 수업을 하자 했지만 선을 분명히 그었다. 후임 강사를 찾게 될 것이다. 동인지 징검다리13집을 내면서 15집까진 가야 한다고 했는데 참 아쉽다.

글의 결이 고운 글사모 여류수필가 H가 메일을 보내왔다. “선생님이 얼마나 큰 산인지 깨닫게 됩니다. 산이 항상 제자리에 있듯 머잖아 선생님의 자리로 돌아올 거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예쁜 표지의 산문집 일일일을 펼쳤습니다. 수필 중 내 몸에 불청객을 들이다의 글을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불청객이라 한 낯선 손님과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군요. 살살 달래며 살아가야겠지만 바람은 어느 날 , 너랑 살기 싫어.’ 하고 떠나는 기적입니다. 아브라카다브라!”

아브라카다브라는 유대인들이 병이나 재앙을 물리친다는 뜻의 주문으로 우리말의 수리수리마수리. 한라산이 유난히 가까이 다가앉아 말을 걸어온다. “다 내려놓고 글이나 쓰되, 그것도 팍 줄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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