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적 침투하자 목숨걸고 앞장선 월남전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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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상순, 1863년 별시문과 급제 후 제주판관·구례현감 등 역임
 송서규, 학도병으로 입대해…순국 후 1계급 특진·태극무공훈장
 송석진, 방성칠 난 진압 공로…제주목 주사 거쳐 군수 등 지내
 송성철, 해녀 항일 운동 도모해…일본 도쿄서 ‘조선신문’ 발간 
 송세훈, 1927년 성산면 체육대회에서 싸움 거는 일본인에 맞서
지난달 제주시 건입동 소재 월남참전기념탑 앞에서 열린 월남참전기념탑 명각준공기념식. 송서규는 1966년 8월 월남전에 참전해 오작교 작전, 비마 작전 등에서 공을 세우고 1967년 전쟁 현장에서 순국했다. 사진=월남전참전자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 제공
지난달 제주시 건입동 소재 월남참전기념탑 앞에서 열린 월남참전기념탑 명각준공기념식. 송서규는 1966년 8월 월남전에 참전해 오작교 작전, 비마 작전 등에서 공을 세우고 1967년 전쟁 현장에서 순국했다. 사진=월남전참전자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 제공

▲송상순宋祥淳:1842(헌종8)~1921(일제강점기), 한말 문신, 고종 때 제주판관, 전라도 구례현감. 

조천읍 조천리(조천포)에서 송응환(宋膺桓)의 아들로 출생, 1863년(철종14) 별시문과에서 갑과로 급제했다. 

1879년(고종16) 2월에 양제하(梁濟厦)의 후임 제주판관으로 도임하고, 1880년 10월에 장령으로 제수된 후 떠났다. 뒤에 전라도 구례현감을 역임하고 벼슬이 헌납(獻納)에 이르렀다. 

판관 송상순 시혜비.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에 있던 것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겼다.
판관 송상순 시혜비.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에 있던 것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겼다.

제주에 임술민란이 일어나 조정에서는 1863년(철종14) 봄에 제주안핵겸찰리사(濟州按覈兼察理使) 이건필(李建弼)을 파견했다. 

시제 ‘궐포귤유석공부厥包橘柚錫貢賦’를 가지고 과장을 개설해 문과에 5명, 무과에 38명을 시취할 때 그는 김병수(金炳洙), 신재호(愼哉祜), 한윤석(韓胤錫)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다.

▲송서규宋瑞奎:1933(일제강점기)~1967, 육군대령 백마부대 대대장으로서 월남전에서 순국, 원적은 서귀포시 서귀동.

광복 후 부친을 따라 귀국, 성산읍 온평리(열운이)에 정착했다.

 6·25전쟁으로 서귀농업중학교 4학년 때 학도병에 지원해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제7기를 마쳐 소위로 임관, 1952년 2월 특수정보교육 수강을 하러 도미(渡美)했다. 

육본 특수부대 작전참모를 거쳐 5·16정변 때 혁명검찰부 부장 박창암(朴蒼岩)의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제주시 노형동 소재 충혼묘지 입구에 세워진 송서규 대령의 동상.
제주시 노형동 소재 충혼묘지 입구에 세워진 송서규 대령의 동상.

공수특전단 대대장 등을 지내고 1966년 8월 월남전(越南戰)에 참전해 백마부대(보병 제9사단) 대대장이 돼 오작교 작전, 비마 작전, 부르도자 작전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귀국 이틀을 남긴 1967년 11월 6일 베트남 ‘닌호아’군 ‘닌디’ 마을 지역에 월맹군(越盟軍)과 베트콩이 침투했다. 늪지대에 고립돼 중대장과 소대장이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부하들을 잘 후퇴시켰다. 

순국(殉國) 후 1계급 특진과 군인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동상이 세워졌다. 

국가보훈처, 제주도, 베트남참전유공자회, 갑종간부 7기동기회와 유족의 뜻을 모아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 입구에 2006년 5월 6일 송서규 동상을 세웠다. 

▲송석진宋錫珍:1883(고종20)~1902(광무6), 한말 고종 때의 제주군수(정의군·대정군을 제외한 관할 구역), 본관 여산, 현감 송두옥(宋斗玉)의 장남.

1898년(광무2) 방성칠(房星七)이 민란을 일으켜 주성이 7일 동안이나 함락됐다. 그의 숙부 송윤옥(宋允玉), 홍재진(洪在晋), 김남윤(金南胤) 등 7명이 모여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창의소(濟州倡義所)를 마련, 조천, 신촌, 별도(別刀)의 주민 4000~5000명을 움직여 민란에 대항, 주성을 되찾고 난을 평정했다.

이때 송석진은 창의발통(倡義發通)하는 데 선봉적인 역할을 했다. 1898년 7월 제주목 주사를 거쳐 1902년(광무6) 8월 26일, 김창수(金昌洙)의 후임 군수로 임명됐다. 동년 11월 8일,  병으로 사망했다. 

▲송성철宋性徹:1912(일제강점기)~?, 항일언론인, 해녀 항일 운동의 배후, 일제하에 제주 청년동맹과 야체이카의 활동 및 일본 공산당 항일 운동. 분단 시대의 정치가. 가명 박경일(朴京一), 본관은 여산, 

송전수(宋銓洙)의 아들로 제주시 이도동 1346번지에서 태어났다. 전 대정현감 송두옥(宋斗玉)의 종제인 송윤옥(宋允玉)의 손자이며 해방 후 민족 지도자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큰 사위이다.

1932년 1월 해녀 항일 투쟁이 일어나자 제주 야체이카와 혁우동맹이 탄로나 체포되고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 도쿄에서 ‘조선신문’ 편집부원이 됐다. 편집의 주안점은 재류조선인(在留朝鮮人)의 아동 교육 문제, 도항문제(渡港問題), 주택 문제, 민족차별 문제, 교포의 실업에 따른 취업 문제 등이었다. 

송성철은 편집부원으로서 내부 일을 맡아보면서 동경과 횡빈에 사는 한국인 친목 단체와 한국인 유학생 동창회를 중심으로 독자망 확충에 힘썼다. 

1936년 2월 1일 창간호를 내 매월 1회 4000부 내외를 인쇄, 동경을 중심으로 각지에 배포했다. 제8호 발행 준비중에 일제 당국에 검거됐다. 이 일로 항일 동지 17명과 함께 일경에 검거돼 1937년 7월 동지들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시청에서 기소 유예처분을 선고받았다. 

▲송세훈宋世勳:1897~1943, 행정 대서업자, 씨름장에서 항일 활동, 성산포청년회 회장, 본관 은진(恩津).

1927년 5월 15일 개최된 성산면 체육대회가 일본인과의 폭력사건으로 번져 2명이 사망했다. 이에 고은삼 등 3명은 징역 3년, 한봉희(韓奉禧) 등 5명은 징역 1년 6월, 기타 다수에게는 징역 1년이 선고됐다.

그는 이 일로 체포돼 1927년12월 16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控訴)하니 1928년 12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고은삼(高殷三)과 함께 무죄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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