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시대적 아픔과 이방인 상처를 예술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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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종,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장…재일교포 권익 보호에 헌신
 송순혁, 서귀포서 야학소 운영하며 항일 운동하다 옥고 치러
 송영옥, 제주시 조천읍 출신…민족의식 투영 독창적 작품 활동
 송윤원,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후 도립병원 내과 과장 등 역임
 송인복, 생활 형편 어려워 모래판에 글씨 연습…명필로 명성
 송인원, 지혜롭고 외모 출중해 당시 사람들에게 노호로 불려
송영옥 작가의 작품 ‘슬픈자화상’.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 재일 이방인의 고통에 절규하는 작가 자신이자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그렸다. 제주시 조천읍 출신 재일교포 송영옥은 메시지가 강하고 호소력이 뛰어난 작품들을 주로 남겼다.
송영옥 작가의 작품 ‘슬픈자화상’.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 재일 이방인의 고통에 절규하는 작가 자신이자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그렸다. 제주시 조천읍 출신 재일교포 송영옥은 메시지가 강하고 호소력이 뛰어난 작품들을 주로 남겼다.

▲송순종宋純鍾:생몰년 미상, 재일 동포 기업가, 북한의 민주화와 재일 동포의 장래를 연구하는 단체 ‘민주 무궁화’의 회장. 

서귀리(서귀포)에서 1920년 아버지 송문준과 어머니 오정순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97년 7월 7일 ‘북조선의 민주화와 재일 교포의 내일을 생각하는 모임-민주 무궁화’를 결성해 회장이 됐다. 7개 지역에 지부를 마련하고 회원이 300여 명이나 됐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경제 성장의 붐을 타게 되고 그도 5개의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이름이 알려진 사업가로 대성할 수 있었다. 

송순종은 재일동포 권익 옹호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향학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일을 교육 지원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동포 자녀들의 초·중학교 설립을 위해 큰 자금을 쾌척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조총련이 운영하는 민족학교의 교육회장, 효고현 조선인 교육회장, 학교법인 이사장 등을 거쳤다. 또 ‘재일조선 상공연합회’ 부회장, ‘효고현 조선인 상공회’ 회장 등을 두루 역임한 동포 사회의 거목이었다. 

▲송순혁宋純赫:1914(일제강점기)~1976, 서귀포 야학소 항일 활동, 본관은 여산, 서귀리에서 송문준(宋文準)의 아들.

그는 1935년 3월 양원득의 집에서 야학소를 운영, 저항 의식을 강조했다. 

이 일로 전남경찰부 노경부(盧警部)의 지시를 받은 제주경찰서는 서귀포를 중심으로 송순혁 외 40여 명을 검거한 후 3개월 동안 심한 조사를 해 송순혁, 송달오, 강원화(康元化·25·법환), 변성현(邊聖現·22·법환) 등 4명만을 기소했다. 1937년 6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각기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모두 옥고를 치렀다.

송순혁은 1976년 11월 18일 일본 고베(神戶)시 수마구(須磨區) 간수정(干守町)에서 사망했다. 

 

 

 

 

 

▲송영옥宋英玉:1917(일제강점기)~1999, 재일교포 화가, 본관은 여산.

산북 조천리(조천포)에서 태어나 1944년 오사카(大阪)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조국이 해방되고 오사카미술관 연구소에서 6년 동안 미술 공부에 몰두, 오사카시전(大阪市展)에 입선해 가작(佳作)상을, 또 ‘다-나’상, 시장상을 수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사이(關西)종합미술전에 출품하고 이어 현대 구상계 작가초대전 등에 수차례 출품한 바 있다. 

그는 일본 미술계에서 독특한 활동성을 보인 이색적인 화가임에 틀림없다. 현대 구상수작전(具像秀作展)에 초대된 바 있는 훌륭한 작가이면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 나름대로의 선을 지녔다. 

교포 미술가들이 개최한 고려미술전(高麗美術展)에 출품하기도 했다. 1955년 광주 비엔날레에 ‘5·18 광주’ 등을 출품한 바 있다. 

1999년 4월 9일 도쿄 니시닛보리(西日暮里)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메시지가 강하고 호소력이 뛰어나다. 

송(宋)화백은 1957년 도쿄로 이주, 귀국도 늦어졌다.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이 투철해 군사독재를 고발하는 작품도 남겼다. 

그는 해방 직후부터 50년대 말까지 간사이(關西)종합미술전, 일본 앙데팡당전(展) 등에 출품했다. 

1957년 오사카에서 도쿄로 삶의 무대를 옮긴 후에는 조국의 닫힌 문에서 귀국의 열망을 그린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유리를 이용해 동물 등 모든 형태를 창출해 내던 송 화백의 빼어난 솜씨는 미국의 라이프지(誌)에 소개될 정도로 일본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를 아는 작가들에게 치열한 작가 정신과 깊은 내면으로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1978~1982년까지 개인전을 5회나 가졌다. 

지난 1990년 평화상을 수상, 1990․1991년 한일교류전에 참가했다. 

▲송윤원宋輪源:1927(일제강점기)~1989, 의사, 제주가족계획협회장.

조천읍 신촌리 2088번지 독립운동가 송종현(宋鍾炫)과 어머니 고복진(高福珍)의 아들이다. 

중등교육을 마치고 의학에 뜻을 두어 세브란스의전(醫專)에 들어간 것은 해방 1년 전,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49년 6월이었다. 

그해 11월 고향에 돌아와 도립병원 내과 과장에 취임, 1953년 6월에 북제주군 보건소장, 그 후 1960년부터 약 1년간 제주적십자의원 내과과장을 지내고 1964년부터는 제주노동의원 원장에 취임해 약 10년간 어려운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1974년 5월 송의원(宋醫院)이라는 간판을 걸고 이도2동에 개인병원을 차렸다. 뒤에도 가족계획협회 제주도지부장을 맡아 부속병원을 정상화시키고 제주도 가협화관(家協會館)을 신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반 조성을 하는 등 가족 계획 사업에 공헌하는 바가 컸다.

부인 김완옥(金婉玉)과의 사이에는 2남 3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장남 송동호(宋東浩)가 의과대학을 졸업해 서울에서 개업의(開業醫) 2대를 계승하고 있다. 

▲송인복宋仁福:생몰년 미상, 서예가. 

열녀 문씨의 아들로 주성(州城)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했다. 지필(紙筆)이 없어 하얀 모래판 위에 글씨를 쓰면서 배워 마침내 명필로 알려졌다.

아마 열녀 문씨는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기재된 제주시 건입동 태생 송덕보(宋德寶)의 처인 듯하다. 16세에 시집을 와서 집이 가난해 품팔이하면서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했다. 결혼한 지 4년 만에 남편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아 문을 닫고, 식음을 폐해 21일 만에 사망했다.

▲송인원宋仁沅:생몰년 미상, 지모(智謀)와 외모(外貌)가 뛰어난 인사, 본관은 여산.

제주목 안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사람들이 노호(老虎)라고 칭했다. 

지기(智器)가 남보다 뛰어나 중국 사람이 그를 만나 보고 크게 탄성을 했다. “만약 우리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하곤 500금을 내놓으면서 함께 돌아가자고 간청했으나 그의 부모가 거부하므로 부득이 그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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