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 독립운동 앞장서다 옥고…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스타우트, 미군 장교…美 군정 제주도 초대 도지사로 재임
신구범, 前 공직자·정치인…제29대·31대 제주도지사 지내
신두방, 광복 이후 언론인으로 활동…제3대 도의회 의장
▲송호련宋湖連:1918~1944(일제강점기).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학생 항일활동.
일본군으로 남양(南洋)군도에서 전사, 서귀포시 서홍동(서-홍로)에서 태어나 일본 도요지마(豊島)상업학교에 재학 중, 송은 동지 6명(전북 출신 유학생)과 함께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1940년부터 뭉쳐진 동지들은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는 내부 모순으로 붕괴될 것이니 일본은 곧 몰락한다”고 믿었다.
그는 1941년 12월 13일 검거, 이듬해 5월 25일 요코하마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는 후일 강제 징집으로 군대에 동원돼 1944년 5월 29일 남양(南洋)방면 뉴기니아군도群島의 전투에서 일본군으로서 전사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한국독립의 호기가 왔다고 보아 동월 12일 저녁 식당에 모여 △도쿄(東京)는 공습을 받아 사상적인 혼란에 몰입할 것이다 △일본은 무력전에 강하지만 경제전에 필패(必敗)한다 △미·쏘의 원조에 의해 한국은 독립될 것이다 △동지들은 빨리 귀향해 농민층에 항일조직을 확대할 것 등을 기도했다.
▲스위니:1911~1986, ‘스위니’ Sweeney, Augustine는 제주도 천주교 신도 및 신부의 항일활동 주도, 신부.
한국 성씨로는 서(徐)신부. 본명은 오스틴 스위니(Sweeney, Augustine.).
영국 아일랜드 토니콜주(州) 타케닉과멘트 타운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멜보른 센트파트릭 중학교를 거쳐, 멜보른 센트 콜롬반 대학 철학부를 졸업했다.
1935년 아일랜드 센트 콜롬반 신학교를 졸업했다. 센트 콜롬반 선교사회(宣敎師會)의 선교사가 돼 목포성당에서 재임했다. 처음 제주 중앙성당 신부로 있다가 1936년 10월 산남 서홍리 홍로성당 주재신부로 명을 받았다. 1939년 2월경 신도 강군평(康君平)에게 “일본군은 중국 소주(蘇州)를 점령, 다수 살해했으니 비인도적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1940년 4월 “미국이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을 지원하지 않으면 끝났을 터인데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 일본은 승리할 수 없다”라고 반전사상을 전파했다.
또 서귀포에 거주하는 만주국 사람 당덕윤(唐德潤)에게 “지금 일본군은 중국의 장사(長沙)를 점령했지만 중국군이 완강히 저항, 일본군 전사자가 많이 속출해 손해는 일본 측이 더 클 것이다”라고 했으며 이들 신부들은 일본은 중·일 전쟁에서 패망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설교했다. 1941년 10월에 그가 체포되고 1942년 10월 24일 광주 지방법원에서 금고 2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아우 예롬 스위니(Sweeney, Jerome.)도 제주 중앙성당 신부로 일을 봤다.
제주도 천주교의 항일 활동은 당시 천주교 신부였던 손신부(孫神父·Dawson, Patrick)와 서신부(徐神父·Sweeney, Augustine) 그리고 나신부(羅神父·Ryan, Thomas. D.) 등 세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경우, 동양에서 천주교의 포교는 불가능해지고 서양인은 동양 각처에서 쫓겨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1939년부터 제주 천주교회에서 신도들에게 신문과 라디오 방송이 항상 일본의 전과를 과대하게 보도하는 데 불만을 품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강요로 1943년 5월 홍로성당의 관리 책임자도 서(徐)신부의 명의로 됐던 것을 목포시 산정동 97번지의 일본인 와키다(脇田淺五郞)의 명의로 변경해 천주교를 일본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때부터 일제는 성당의 감시 감독을 한층 강화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스타우트:생몰년 미상, ‘스타우트’ Stout, ThurmanA는 미군 장교. 제주도 미(美) 군정청 초대 도지사, 수석 민정관(民政官).
당시 육군 소령으로 미군정 제59중대를 인솔, 1945년 11월 9일에 제주도에 도착해 일본인 도사(島司)로부터 도정(島政)을 인수받아 민정 도사 김문희(金汶熙·조천)와 함께 같은 집무실에서 도정을 집행했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전남(全南) 군정 도지사는 ‘라인트너’Lintner, Julius H.중령이었다.
스타우트 소령은 미 제59군정 중대를 인솔, 1945년 11월 9일 제주에 진주한 후 제주도사(島司)로 부임, 얼마 후에 제주도(島)가 도(道)로 승격하면서 제주도지사로 임명된 박경훈(朴景勳)과 함께 집무하다가 동년 4월 2일까지 1년 5개월 동안 도정을 펼쳐 나갔다.
스타우트(stout) 소령은 박경훈과 더불어 제주도의 공동 도지사로 있었는데, 동년 2월 15일부터 수석 민정관 즉 고문으로 되어 박경훈이 단독 도지사이면서 형식적으로는 고문 혹은
수석민정관이라 불렀지만 실질적으로 미군정기여서 도지사와 경찰은 모두 그가 지휘하고 있는 셈이었다.
▲신구범愼久範:1942~생존. 조천읍 신촌리 출신. 육군사관학교 수학.
제29대(1993년 12월 27일~1995년 3월 28일) 제주도지사, 제31대 제주도지사(1995년 7월 1일~1998년 6월 30일)
▲신두방申斗玤:1906(광무10)~1965, 언론인. 제주도의회 의장. 호는 국헌(菊軒).
본관은 평산, 제주시 이호동(백개)에서 신용식(申庸湜)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8·15 광복 후 제주신보 전무, 1952년 4월 제주읍의회 의원에 당선, 1955년 읍의회 부의장으로 당선되고 동년 7월 제주읍을 제주시로 승격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동년 9월 1일 읍이 승격 계승하게 됨에 따라 자동적으로 시의회 부의장이 됐다. 1958년 11월 4일에 4·3 사건과 관련된 ‘군경민’ 합동추도식을 관덕정 광장에서 거행, 그는 동 행사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약했다.
한편 1961년 3월, 4월 혁명 후 언론 자유가 보장돼 제주매일신문을 창간, 초대 사장에 취임했으나 몇 달 후에 5·16이 일어나 신문사는 폐간되고 한때 구속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4·3 진상규명 운동에 앞장서던 그는 5·16으로 학생들과 함께 구금을 당해 온갖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60년 12월 제주신문 전무로 있을 때 제3대 제주도의회 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 동 12월 22일에 개원해 의장에 당선됐다.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로 의회가 해산되자 6개월 만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체육인 신정용(申正容)의 선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