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들불축제 개최하는 등 제주 문화 발전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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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진, 학생 항일 운동 주도…독립유공 건국포장 추서
신철주, 항일독립·해녀기념관·돌문화공원 개관 등 치적
신휴근,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활동 전개
안구현, 중문리서 청년 활동으로 일제 항거하다 옥살이
안달삼, 조선 말기 한학자…‘도학의 남방 사표’로 찬사
안봉려관, 관음사 창설 여승…제주 불교 문화 계승 일조
2021 제주들불축제가 열린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에서 지난 3월 13일 축제 하이라이트인 오름 불놓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1997년 북제주군 당시 고(故) 신철주 군수가 새해 첫 대보름날을 맞아 목야지에 큰 불을 놓아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조화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염원하기 위해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한 것이 제주들불축제의 기원이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2021 제주들불축제가 열린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에서 지난 3월 13일 축제 하이라이트인 오름 불놓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1997년 북제주군 당시 고(故) 신철주 군수가 새해 첫 대보름날을 맞아 목야지에 큰 불을 놓아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조화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염원하기 위해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한 것이 제주들불축제의 기원이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신창진愼昌珍1914~1940(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 활동.

본관은 거창, 신원식(愼元植(5, 구좌읍 월정리(무주-) 태생, 193137일 제주농업학교를 졸업, 동년 양치삼(梁致三·21·대림)과 신찬익(申璨翊·20·대림) 등은 교장실로 들어가 이는 황민화(皇民化)교육에 대한 발로였다. 그는 39일 체포돼 1931829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하니 193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 정부에서는 1993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신철주申喆宙1938(일제강점기)~2005, 재직 중에 순직, 본관은 평산, 신남호申南浩(일명 계생癸生)4남으로 한림읍 귀덕리(-)에서 태어났다.

한림공고를 나와 귀덕리 이서기(里書記)로 출발, 1964년 행정공무원으로 출발, 행정서기관으로 제주도 식산국장, 지역경제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하고 북제주군수로 임명됐다.

1995년 민선 초대 북제주군 군수 이어 민선 2기와 3기 군수로 당선 공직 42년 맞는 2006622일 과로로 순직했다. 북제주군 군장(郡葬)으로 거행되어 군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공직 30년이 되던 1994년 관선 군수를 지나고 특히 재임 중 문화행정을 잘 펼쳤다고 평한다. 북제주문화원의 개설과 사무소 건물을 지었고 한경면 저지리(닥마루)에 문화예술촌 개설과 미술관 건립, 조천리에 항일독립기념관 개관, 구좌읍 상도리(도려)제주해녀기념관개관, 조천면 교래리()-문화공원개설, ‘새별-오름의 들불축제 행사 등 많은 행정실적을 올렸다. 전국 군()단위 인구 7, 군수재직 11년 동안 모두 8회에 걸쳐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신휴근愼庥根1908(융희2)~?, 광주사범학교 학생의 항일활동.

본관 거창, 신수학(愼洙學)의 아들로 화북리(별도)에서 태어났다. 192911월 전남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학생에 대해 모욕적인 언동이 발단, 폭력 충돌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번져 집단 시위의 운동으로 발전, 그는 체포되고 193010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6월형을 선고.

제주 출신들은 모두 항소해 대구 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그는 19297월 전남공립사범학교(광주사범 전신) 3학년에 재학 중 독서회 중앙본부산하 전남사범학교 독서회에 가입, 사회과학연구를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했는데 창립 멤버 14명 중 강문범(姜文範·상예이신형(李信珩·조천신휴근 등 3명은 제주 출신이었다.

1929113일 광주역 앞에서 광주고보(光州高普)의 학생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과의 사이에 쟁투가 일어나자 광주고보 학생 300명과 전남사범·광주농업 학생들은 합동하여 광주시내의 요소요소에서 항일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학교에서는 114일부터 11일까지 휴교를 한 후 12일 개교했다.

안구현安九玹1901(광무5)~?, 제주 중문리 청년의 항일 활동, 일명 안두은(安斗銀).

본관은 순흥, 안영화(安永化)3, 중문면 도순리(돌숭이)에서 태어나 제례를 방해했다. 운동가 김한정(金漢貞)의 민족의식이 강하다.

19321월 구좌면 동부에서 해녀 항일투쟁이 일어나 중문지역의 일을 조사하던 중 혁우동맹과 제주야체이카 조직이 탄로, 3월 이들도 체포돼, 그는 1933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0월형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안달삼安達三1837(헌종3)~1886(고종23), 한학자, 문사.

자는 행오(行五), 호는 소백(小栢)이요, 본관 죽산, 조천면 선흘리(선흘-)에서 태어났다.

그가 호남의 명유(名儒) 기정진(奇正鎭)에서 수학하고 귀향할 때 스승이 백목(柏木) 한 그루를 주니 이를 고이 가지고 와서 기념으로 집안에 심었기에 이로부터 호를 소백이라고 불렀다. 그는 조천리에 옮겨서 신촌리(숙군)의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에게 한문을 배운 다음 성리학자 노사(蘆沙)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했다. 후일 안소백과 아들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은 광주로 이거(移居)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어떻든 기정진이나 최익현과 같은 거유들과 교유한 안달삼으로서는 도학의 남방 사표라고 찬사를 받았다.

안봉려관安蓬廬觀1865(고종2)~1937(일제강점기), 여승(女僧,) 제주 관음사의 창설자.

속명은 안여관(安廬觀), 본관은 순흥, 아버지 안치복(安致福)과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의 둘째 딸로 화북리(별도)에서 태어났다. 1882년 봄 같은 마을의 현국남(玄國南)과 결혼해 14녀를 낳았으며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 멀리하더니 1907년 전남 해남군 대흥사의 유장(宥藏) 스님이 법명을 봉려관이라 했다.

192311월에 제주불교협회가 창립, 이때 회장에는 이회명(李晦明) 선사, 부회장 김태민(金泰玟·의사), 총무 양홍기(梁洪基·변호사) 등이 활약할 때 봉려관은 구제부장이었다.

봉려관은 1925년 가을 안도월과 힘을 모아 제주시 2도리의 토지 516평을 매입, 포교당을 창건하고 한편 1926년 안도원 선사와 같이 법화사를 중창(重創)했다. 불교협회의 결성과 이회명 법사의 설교야말로 제주불교의 융성을 가져온 동기가 됐다.

그녀는 1938526일에 아라리(아라위) 관음사에서 입적했다.

옛 기록에 보면 제주의 사찰은 제주목(濟州牧)에 존자암, 월계사, 수정사, 묘련사, 문수암, 해륜사, 만수사, 강림사, 보문사, 선천암, 소림사, 관음사, 곽지사, 원당사, 돈수암 등이 있었다. 정의현(旌義縣)에 영천사과 성불암이 대정현(大靜縣)에 법화사, 산방굴암 등이 있었다.

조선조 숙종 때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광양당(廣壤堂) 등 음사(淫祠)를 모조리 불태우고 해륜사, 만수사를 비롯해 많은 사찰을 훼철하여 불상은 바다에 던지고 승도들을 귀농시켰다.

이런 결과로 도내에는 200년간 사찰다운 사찰이 없었는데 안봉려관 비구니에 의해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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