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고향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주 발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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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인, 무속인…무형문화재 제71호 칠머리당굿 기능보자
안세훈, ‘간도 간민교육회’ 상무 서기 등 일제 맞서 독립 운동 
안응수, 일도동 출신 여성 독립 운동가…항일운동으로 옥고
안재호, 경제인…표선~가시 포장 사업 등 애향심으로 거액 기탁
안창원, 4·19혁명 참여해 희생…제주 출신 유일한 공로자
1946년 1월 제주항에서 열린 칠머리당 영등굿 장면. 해방 이후 최초의 컬러 동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46년 1월 제주항에서 열린 칠머리당 영등굿 장면. 해방 이후 최초의 컬러 동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안사인安仕仁1928(일제강점기)~1990, 무당. 중요 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 칠머리당굿기능보유자.

보유 종목은 무가(巫歌)이다. 본관은 순흥. 조천리에서 세습무인 안임생(安任生)의 아들이다. 제주 군사비행장의 일군(日軍)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세 때 아버지가 죽자 굿을 시작했다. 23세에 입무의례인 신굿을 해 용담2동의 본향당인 까스락당의 대표심방이 됐다.

1967년 영감놀이를, 1968년 영등굿놀이를 출연해 공보부장관상·대통령상·국무총리상 등을 받았다.

1980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주칠머리당굿기능보유자가 된 이후 당굿의 보존회 회장이 되어 당굿을 보존하는 데 노력했다. 스스로 심방임을 자부하며 굿을 지키고 알리고 가르친 제주의 대표적 심방이다.

안세훈安世勳1893(고종30)~1953(분단시대), 독립운동가, 광복 후 좌익계의 영수(領袖).

일명 안요검(安堯儉). 호는 근해(槿海). 본관은 죽산, 조천읍 조천리에서 안태환(安台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남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로 한학을 수학하러 갔다.

이 마을은 조천 태생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이 한말에 이적(移籍)해 온 곳으로 아들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에게 글공부하러 갔었다.

19266월 만주 땅 간도間島로 건너가 간도 간민교육 연구회상무 서기로, 동북 삼성(三省)에서 독립 운동가들과 어울렸다.

신좌(新左)소비조합에 관여한 김시용, 안세훈, 김유환, 현사선(玄詞善·본명 사선 巳善), 김평원(金平遠) 등은 반전사상을 고취해 이들을 1942년에 검거됐다. 그는 1942813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김시용은 옥사, 나머지 3명도 옥고를 치렀다.

안응수安應洙1919(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

제주시 일도동(제주-성안) 태생으로 그녀의 신상은 알 수 없다. 이규창(李圭昌)의 옥중 체험기 운명의 여신(餘燼)’이란 저서(pp.297~305)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다.

이규창은 서울에서 이회령(李會寧)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 ()중국 일본공사를 암살한 관계로 투옥됐다. 부친 이회령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의 친형으로 독립운동의 거목이다. 이규창이 재판을 받아 13년째 형기를 치르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44년 초 마침 여자 감방에 수감된 여성을 우연히 상봉, 미모의 이 여성에 연정을 가져 서로 몰래 사랑을 속삭였다.”라고, 이규창으로서는 이 여성의 동정에 깊은 관심을 가져 살폈는데 19451월 그녀는 광주형무소에서 가출옥됐다. “형무소장 일본인 구니미츠’(國光)의 알선에 의해 일본 해군함정 편으로 제주도로 귀향시켜 줬다.”라고, 바로 이 무렵 옥중에서는 일본인들이 우리 동포 10만명을 학살하려는 비밀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도 유포되고 있었다.

몇 개월 지나 조국은 해방이 되자 출옥하게 되고 1968년 독립유공자로 독립장이란 훈격을 받아 독립공훈록에 등재됐다. 필자가 신상 파악에 노력했으나 여성이어서 찾기가 어려웠다. 아마 천주교도로서 일제 말기 천주교 교도 및 신도들의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소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언도를 받아 수감생활을 한 것이 아닌지 유추해 본다.

안재호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고향 가시리 주민들이 세운 동상.
안재호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고향 가시리 주민들이 세운 동상.

안재호安在祜1915(일제강점기)~1994, 재일교포, 경제인.

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순흥. 표선면 가시리(가스름) 출생, 안승훈(安承訓)의 장남, 1927년 부모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야간 중학을 졸업하고 21세 되던 해에 대동(大同)라이트회사 입사를 계기로 합성수지(合成樹脂) 업계에 투신, 평생을 한 업종에 몸을 바쳤다.

이에 앞서 8·15 해방 직후 일본유기화학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어 안본(安本)화학, 일신(日新)화학, 대한합성공업주식회사 등을 설립하면서 한때 일본유기 그룹을 일본 소득세 납부 순위 24위로 성장시켰다.

일본 전체 단추 생산의 70%를 독점했다. 그가 죽으니 일본 고야산(高野山)의 국립 공원묘지에 4년 전 안장된 부인 송성춘(宋成春·성읍 태생)의 곁에 길이 잠들었다. 한때 전 일본의 재계 순위 24위에 오른 일본 갑부(甲富)이지만 조국에 기여한 바도 컸다.

제주의 고향 발전을 위해 기증 총액이 현시가로 환산 안될 만큼 거액을 기탁했는데 1967년부터 가시리 마을회관 신축 사업, 마을의 전기 사업, 표선중학교 신축비 및 이설비, 표선과 가시리 사이 도로포장 사업에 1650만원을 지원했다.

1976년 가시리 주민들의 최대의 숙원 사업인 가시리와 제동(濟東)목장 간 도로포장 사업비 4000만원을 희사하는가 하면 구() 가시국민학교 부지를 매입, 마을 복지회관으로 쾌척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84년에 처음 제주에서 열린 제13회 전국소년체전에 7000만원의 성금을 내어 제주 체육발전에 기여했다.

한편 고당은 민단 중앙본부 고문, 재일(在日)한국상공인연합회의 고문, 한일(韓日)경제인협회 이사, 재일본 대한체육회 고문, 평통(平統)위원, 서울올림픽후원회 고문, 재일제주도친목회 명예고문, 오사카의 통합 교민)僑民)단체인 간사이제주도민협회의 고문, 전국경제인연합회 해외고문 등을 맡는 등 재일교포 사회에서 가장 추앙받는 인사로서 정부로부터 모란장과 무궁화장 등 각종 훈·포장과 제주도 문화상(공익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가시리민들은 197699일 그의 동상과 송덕비를 향리에 세웠다.

안창원安昌元?~1960.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 재학 중 419 혁명 당시 활동하다

1960428일 희생돼 서울 수유동 국립419묘지에 안장됐다. 제주도 출신으로서는 419혁명에 참여해 활동하다 희생된 유일한 공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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