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고종 황제 강제 퇴위에 분노…동지들과 의병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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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문, 독립운동가 한영섭 추모비 건립…일제에 체포당해
 양기현, 항일 운동하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선고받아
 양기형, 일본서 반일 운동 전개해…광복 2년 후 고향서 사망
 양남구, 법정사 항일 운동 중군대장…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양남석, 일본 침략에 맞서 고사훈·조인관·김만석 등과 봉기
 양달휴, 지역 유학 발전 기여…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위촉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2019년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 제주의병항일항쟁기념탑 앞에서 개최한 제110주년 제주의병항일항쟁 기념식. 양남석은 1909년 3월 3일 일제 탄압에 대응해 고사훈, 이석공, 김석윤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사진=제주도보훈청 제공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2019년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 제주의병항일항쟁기념탑 앞에서 개최한 제110주년 제주의병항일항쟁 기념식. 양남석은 1909년 3월 3일 일제 탄압에 대응해 고사훈, 이석공, 김석윤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사진=제주도보훈청 제공>

▲양구문梁龜文:1907(유희1)~?, 함덕리의 추도비 항일 활동, 일명 양공근(梁共根), 본관 제주.

양대류(梁大柳)의 아들로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제주청년동맹원으로서 1931년 1월 15일 일본 도쿄의 순천당병원에서 한영섭(韓永燮)이 사망, 동월 19일 동지장(同志葬)으로 할 것을 결의했다.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 무산 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 한 그대는 갔지만 그대의 주인정신은 동지마다 계승하여 분투할 것이니 고이 진좌(鎭座)하시라”는 만장 등을 내걸었다. 

비문은 송건호(宋健鎬)가 짓고 김진희(金晋熙)가 글자를 새겼다. 비의 표면에는 ‘同志 赤光 韓永燮 紀念碑’라고 쓰고 이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눌린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 흘린 동지였다.”고 썼다. 

그는 동지 9명과 체포돼 1931년 4월 12일 5명이 송치, 동 8월 5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控訴)됐다. 

동년 12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조기(弔旗), 비석, 상장(喪章) 등을 몰수당했다. 동지 김재동은 옥사하자 공소 기각됐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함덕리 주민 일동의 이름으로 ‘애도 夫生鍾 宋健鎬 韓永燮 金才童군’이란 비석이 새로 세워졌고 비문 내용은 일제 당시의 글월을 그대로 새겨 건립했다. 

양구문은 일본 도쿄 히가시요도가와(東淀川區)에서 살다가 타계했다. 

▲양기현梁琪鉉:1901(광무5)~?, 무극대도교 항일 활동, 본관은 제주.

양경원(梁景原)의 장남으로 애월읍 어도리(도노미)에서 태어나 안덕면 동광리(무등이-왓)에서 살았다. 

1936년 11월 상순 별채 가옥을 강승태(姜昇泰·46·하예)에게 대여해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 본부로 정했다. 그는 무극대도교를 믿었다. 

신도 김경식(金景軾·71·화북)은 옥사하고 나머지 20명은 각각 불경죄, 사기, 강간 치상, 총포 화약 취체법 위반 등 온갖 범죄로 옭아매 선고했다. 

그는 1940년 12월 광주지법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양기형梁基亨:1916(일제강점기)~1947(미 군정기), 일본 공산당 항일 활동, 

그는 양군석(梁君錫)의 3남, 안덕면 덕수리(새-당)에서 태어났다. 사립 고노하나(此花)상업학교 3년을 수료했다. 

그는 도쿄(東京), 가나가와(神奈川), 오사카(大阪) 지방에서 1934년 2월 ‘일본 공청 간사이(關西)지방위원회 준비회’에서 활동했다.

또 동년 4월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고 남일남(南一男)과 함께 당(黨) 오사카시 위원회 남(南)지구 준비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1935년 1월 21일 기소, 1936년 6월 27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후유증 때문인지 광복 후 귀향한 지 2년도 안 돼 안덕면 사계리에서 사망했다. 

▲양남구梁南求:1892(고종29)~1976, 무오년 법정사 항일 운동. 자는 왕석(王石), 호는 낙천, 원적은 조천리, 본관 제주. 양용환(梁用環)의 아들.

제주시 용담동에서 태어나 서귀읍 서홍리(홍리)로 옮겨 살고 있었다. 

봉기군의 중군대장(中軍大將)이다. 

일제는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대전(大田)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7일 일본 대정천황(大正天皇)의 득남(得男)으로 인한 특사령에 의해 징역 2년으로 감형돼 목포형무소에서 석방됐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양남석梁南錫:생몰년 미상, 한말 제주 의병 항일 활동, 제주면 동광양(과양)에서 거주.

제주의 의병 활동은 일본이 고종 황제를 위협해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데 대해 온 국민의 분노가 분출해 일어난 거사였다. 

일본은 1908년 제주경찰서장에 통감부(統監部)의 경부(警部) 시미츠(淸水重滿)를 임명, 대정·정의·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分派所)를 설치해 도민을 위협하기도 했다. 

1908년 12월에 사임한 윤원구(尹元求) 제주군수는 “일본이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이 나라의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했으니 어찌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제주를 떠났다. 

이에 주성(州城) 동광양 쪽에 살던 유생 고사훈(高仕訓·39·의병장), 이석공(李錫公·개명 중심), 김석윤(金錫允·개명 석명), 조인관(趙仁官), 노상옥(盧尙玉) 등이 거사를 의논한 핵심 인사였다. 

고사훈은 서당숙장 김석익(金錫翼)과 고성모(高聖模)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1909년 2월 25일 조인관의 집에서 고사훈,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김재돌, 양남석, 한영근, 김만석(25) 등이 모여 기병(起兵)할 것을 결의하고 의병장(義兵將)에 고사훈과 이중심을 추대했다. 

거사일을 동년 3월 3일 주성(州城)을 점령하기로 정해 격문과 통고문을 2월 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돌려, 병력 동원차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당일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안성 등지에서 장정 300여 명을 가담시켰다. 

이때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는 관군·장정 30여 명을 동원해 경찰과 공조하면서 의병 활동을 차단했다. 이에 무력에 의존한 경찰과 맞설 수 없어 2월 28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당했다. 조인관은 순사(巡査) 강원호(康源鎬)가  체포하려 했으나 뿌리쳐 도주했다. 

동 3월 3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총살되고 의병 참모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됐다. 

이중심, 조인관, 노상옥 등은 귀덕(歸德) 포구에서 육지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양달휴梁達休:1849(헌종15)~1932(일제강점기), 선비, 학무위원, 자는 내징(乃徵), 호는 묵암(黙菴), 본관은 제주.

제주시 화북리(벨도) 거로촌에서 태어났다. 

동향 사람이며 1년 연상의 김이경(金履慶)과 함께 어린 시절 오현단의 경신재(敬信齋)에서 한문을 익혔다. 향학(鄕學) 발전에 공이 있었다. 수구 보수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항상 문묘 중수를 건의했다.

1909년 2월 25일 공립제주보통학교의 학무위원으로 양달휴, 이양우(李陽雨), 김응빈(金膺斌), 김홍석(金洪錫), 채수칠(蔡洙七), 장제실(張濟實), 김방혁(金邦赫) 등 7명이 위촉됐다. 

그러나 일본식 교육이라 하며 4개월여 만에 그만뒀다. 죽은 후 그의 비문은 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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