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백 마디 말을 그림으로 대신…시사만화 ‘황우럭’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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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병윤, 제주신문 입사해 만화 연재…송하언론상 등 수상
 양병직, 1949년 국회의원 당선돼 법사위원·재경위원 역임
 양봉흡, 정의향교 책임자…박정희 대통령에 유교 진흥 호소
 양붕진, 항일 운동 하다 옥고…모진 고문으로 광복 전 사망
 양석추, 제주시 의원…인화초 개교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해
 양성범, 1795년 갑인년 대흉년에 쌀 100섬 내놔 기민 구제
양병윤 화백이 생전에 만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제주신문에 들어가 시사만화 ‘황우럭’을 연재한 양병윤 화백은 송하언론상, 제주도문화상, 제주도기자협회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양병윤 화백이 생전에 만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제주신문에 들어가 시사만화 ‘황우럭’을 연재한 양병윤 화백은 송하언론상, 제주도문화상, 제주도기자협회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양병윤梁秉允:1944~2015, 만화가.

한림읍 귀덕리 ‘복덕-개’에서 양성호(梁成浩)의 차남으로 태어나 한림공업고등학교를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3년을 수료해 제주신문에 들어가 시사만화 ‘황우럭’을 연재했다.

이후 제주신문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제주도만화가회를 창립했다. 송하언론상, 제주도문화상, 제주도기자협회 특별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2013 화우럭 激浪의 半世紀’, ‘시사만화 1만회 기념작품집’ Ⅰ․Ⅱ권이 있다.

문체부에 ‘황우럭만화천국 사회적협동조합’ 설립 인가를 신청해 2016년 3월 21일 최종 인가를 받았다.

▲양병직梁秉直:1908(융희2)~1975, 정치가, 국회의원, 대한군경전몰유족회장.

한림읍 금릉리 ‘베령이’에서 양원하(梁元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향리의 개량서당의 교사로, 청년운동에도 참여했다. 광복 후 대한청년단 한림면 지부장으로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단장 金仁善)을 출범시켰다.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 시에 북제주군 을구(乙區·애월면·한림면·추자면)에서 출마했다. 이때 양병직은 3474표, 박창희(朴彰禧)는 3190표, 김덕준은 691표를 득표했었다.

4·3 사건으로 투표인수 46.5% 선거가 무효화되자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실시돼 다시 입후보했다. 5776표를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등원 후 법사위원과 재경위원으로 활동했다.

1951년 2월 12일 오전 11시 국회 제22차 본회의에서 각 지방의 피난민과 제2국민병 실정(失政)을 조사하고 귀환한 국회의원 이종현(李宗鉉), 조광섭(趙光燮), 서범석(徐範錫) 등 세 의원의 보고를 청취했는데 배후에서 그의 노력이 매우 컸다.

1952년 12월 9일 그를 포함한 국회의원 일행이 모슬포를 시찰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변경해서 제주읍을 먼저 시찰했다.

국회의원에 있으면서도 아들을 군문(軍門)에 보냈는데 아들은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6·25전쟁 중에 전사했다.

후일 그는 ‘대한군경 전몰유족회’ 중앙회장을 역임하고 유네스코 한국후원회 이사를 지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5년 10월 13일 타계, 한림읍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양봉흡梁奉洽:1904(광무8)~1990, 한시 작가, 자는 갑중(甲重), 호는 춘포(椿圃).

남원읍 신례리(예촌-망)에서 태어났다. 선친 양성하(梁聖廈)에게 글을 배워 시를 잘 지었다. 훗날 정의향교 전교가 돼 향교를 크게 수리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세 번 찾아가 유교(儒敎)진흥을 호소했다.

※양봉흡의 시 丹楓(단풍)=醉霜萬葉向陽斜:서리에 취한 잎은 모두 다 햇빛을 바라보고/蜀道餘輝楚水涯:늦가을 촉나라길 초나라 물과 같다/背日寒香凝液露:해를 등지면 싸늘한 향기에 이슬방울 맺히고/濃秋晩景雍晴霞:가을이 깊으면 저녁 빛은 맑은 노을이 감싼다./愛爾丹心通御階:저다지 붉은 마음은 궁궐 계단을 거닐겠는데/愧吾白首賞山家:나는 한 일 없이 산촌 집을 보고 있으니 부끄러워라/浮世榮枯皆濂是:번성했다 말랐다 하는 세상 모두 이것을 싫어하니/回看黃熟培咨嗟:노랗게 익은 것 돌아보며 터져 나오는 한숨소리만 갑절

▲양붕진梁鵬進:1895(고종32)~1945(일제강점기), 민족종교 미륵교(彌勒敎)를 통해 항일 활동, 일명 양원준(梁元準), 본관은 제주.

양서구(梁瑞九)의 장남으로 제주시 오라리(오라위)에서 태어났다.

1927년 봄 전북 김제군 금산(金山)면 금산리에 가서 김종화(金鍾華)를 만나 그의 권유로 미륵교에 귀의했다.

1943년 2월 16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각각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민족종교는 ‘일망무지(日亡無地)’라는 깃발을 들어 일본은 망하고 곧 밝은 새 세상이 출현한다고 믿고 있었다. 1942년 탄로나 핵심 신도 양계초, 양붕진(53·해안), 송태옥(宋泰玉·54·도남), 이두생(李斗生·54·강정) 등은 체포되고, 또 양원하(梁元河), 변호찬(邊鎬燦)은 구속된 후 혹독한 고문으로 판결이 내리기 전에 옥사했다.

그는 모진 고문과 옥고 끝에 그 여독으로 1945년 7월 16일 사망하니 조국 광복 1개월 전의 일이었다.

교조 정인표(鄭仁杓·전북)도 1940년 일경에 검거돼 8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양석추梁錫秋:1916(일제강점기)~1998, 구좌면 송당리 출신, 1952년 일도 이장.

1954년에는 일도동장으로 8년간 재직했다. 농로를 확장하는 데 애썼다.

1960년대 제주시 의원으로서 인화동을 공식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1982년 인화초등학교 개교에 앞서 개교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초대 학부형 회장을 맡아 존경을 받았다.

대한노인회제주시연합회지부장(1987~1988)과 제주시유도회(儒道會) 회장을 역임했다.

서울 영동정형외과의원 원장 양원찬의 부친이다.

 

 

 

▲양성범梁聖範:생몰년 미상, 정조 때의 순장(巡將), 기민을 진휼(賑恤)한 의인(義人).

1795년(정조19) 제주는 갑인년 대흉년으로 삼읍의 기민이 모두 2만5329명이다.

당시 제주목사 이우현(李禹鉉)이 장계로 호소할 때 본주인 고한조(高漢祚)는 무려 300섬을 의연(義捐)하고 장교 홍삼필(洪三弼)과 유학(幼學) 양성범은 자원해 각각 100섬을 내놓아 기민을 구제했다.

사재(私財)를 내놓은 고한조에게 대정현감으로, 홍삼필과 양성범(梁聖範)은 순장(巡將)으로 승진시켜 임명했다. ‘왕조실록’에는 현감 고한록(高漢祿)으로 기록됐으나 이는 잘못이며 고한조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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