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삼성전 허물자 양을나 위패 안치…탐라 뿌리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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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언, 장학사 등 거쳐 2004~2014년 제주도 교육감 역임
 양성연, 화북동 출신…삼성혈 내 희암양성연기적비 세워져
 양성하, 유학 진흥에 노력…1941년까지 서당 열어 후학 양성
 양성후, 애월교 교사로 있다가 사업 시작…세기건설 前 회장
 양세민, 일본에서 반전 운동…해방 이후 오현중 설립에 힘써
 양순필, 유배문화·문학 연구…제주대 교육대학원장 등 역임
삼성혈 삼성사에서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모습.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 2, 제주도’에 실려 있다. 양성연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삼성전이 허물어지자 시조 양을나의 위패를 모셔가 제사를 지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삼성혈 삼성사에서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모습.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 2, 제주도’에 실려 있다. 양성연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삼성전이 허물어지자 시조 양을나의 위패를 모셔가 제사를 지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양성언梁成彦:서귀중학교와 오현고등학교를 거쳐 제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경북모서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에 첫 발을 내디뎠다.

평교사를 거쳐 교감, 도교육청 장학사, 교장, 서귀포학생문화원장, 제12~14대 제주도교육감(2004~2014)을 역임했다.

 

 

 

 

 

 

▲양성연梁成演:1824(순조24)~1886(고종23), 위패 보존 공로자, 호 희암(喜菴).

화북동<벨도> ‘거로-마을’에서 태어났다.

1871년(고종8) 삼성사(三姓祠)가 훼철, 그는 시조 양을나(良乙那)의 위패를 모셔 사당을 마련, 향사(享祀)를 잇게 했다.

후일 조정에서 삼성 시조의 제향(祭享)을 계속하니 사가(私家)에 모셔 있던 양을나의 위패를 삼성사에 봉환했다. 삼성혈 구내에는 그를 기리어 ‘희암양성연기적비喜菴梁成演紀蹟碑’가 세워졌다.

▲양성하梁聖厦:1874(고종11)~1944(일제강점기), 서당 훈장, 자는 창흥(昌興), 호는 농암(農菴), 본관은 제주.

양달진(梁達晋)의 네 아들 중 장남으로 남원읍 신예리(새-예촌)에서 태어나 포규(蒲葵) 김희정(金羲正·조천)과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조천, 광주로 이주)의 문하생으로 경학을 연마했다.

1941년까지 산남의 위미, 하례, 신례 등지에서 서당을 열어 후생들을 가르쳤다. 정의향교 장의에 천거되자 날로 쇠미해지는 유도(儒道)를 진흥하는 데 노력했다. 농암이 타계하자 그의 문도들은 ‘농암선생 梁公聖厦 유적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양성후梁性厚:1928(일제강점기)~2011, 교사, 건설업 사업가, 호는 후암(厚菴), 제주양씨 사직공파, 서울 소화(昭和)공과학교 기계과 3년 수업, 1957년 제주상고 졸, 1961년 제주대학 5회 법과 졸, 제주대학 13·14대 총동창회장, 1988년-타계까지 세기건설과 세기산업 회장, 후암장학회 창업 이사장.

양상국(梁祥國)의 손자로 제주시 노형동(름)에서 태어났다.

애월교의 교사로 있었고 이후 고내리에서 기업을 창업했다. 고내리 사무소에 ‘후암송덕비’가 있다.

애월읍 고성리 들판의 소유지 수만 평에 전국 양씨 가문의 건승원(乾承原)을 조성하는 등 애월읍과의 인연은 깊었다.

새마을포장, 석탑산업훈장, 국민포장, 국민훈장 동백장, 2010년 일본정부가 수여하는 욱일쌍광장旭日雙光章 등을 수훈했다.

세기건설 대표이사(1969), 대한건설협회 제주지부장(1975~1981), 제주상공회의소 회장(1985)을 역임했고 시모노세끼<下關>상공회의소와 자매결연(1987)을 했다.

제주한일친선협회 회장으로도 있었고 1991년 1월 주한(駐韓) 일본대사관 제주출장 주재관 사무소를 개설하는 데 헌신했다,

▲양세민梁世民:1921(일제강점기)~1969, 일본 오사카에서의 반전(反戰) 활동, 광복 후 귀국해 초기 오현중 교사, 일본식 성명은 요시가와(良川守男), 본관은 제주.

양대일(梁大一)의 차남으로 한경면 청수리(청숫-물)에서 태어났다.

간사이(關西)대학 야간 전문부에 다녔다. 일본인의 차별에 분개, 1938년부터 ‘오오다니’<大谷>중학교의 학우 나태호(羅泰鎬) 외 수명에 대해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다.

1943년 11월 16일 요코하마(橫濱) 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양세민은 1943년 7월 20일에 군 당국의 요구에 따라 군속으로 차출해 군수 공장 및 전선에 배치됐다.

조국이 해방돼 귀향해서 로고스 회원들과 함께 한때 오현(五賢)중학교 창설에 힘썼다.

그 발언 요지는 “조선 민족은 독립하지 않으면 지금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조선어를 강제로 폐지하려는 일본 당국의 방침에는 끝까지 반항하며 이를 유지해야 한다. 조선 민족은 우수한 민족이므로 독립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조선인에 대하여 지원병 제도는 일본이 조선 청년들을 이용하려는 방편이므로 이에 응하는 것은 몰지각한 사람들이다.”였다.

▲양순필梁淳珌:1933∼1994, 호는 근재(勤齋).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1리 1876번지에서 출생해 평생을 조선시대 제주도 유배문화와 유배문학 연구에 헌신했다.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1959)하고,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1970)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1973)했다.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1983)해 ‘朝鮮朝 流配文學 硏究’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제주 신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1959∼1968) 생활을 했으며 문예지 ‘시작업’의 주간(1959∼1961)과 제주신문 논설위원(1966∼1968)도 지냈다.

한때 서울의 세종대학교 부속고등학교 교사(1968∼1974)를 지내기도 했고 이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1974∼1994)를 역임했다.

제대신보사 주간(1977∼1978)과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장(1986∼1991)을 지냈으며 1987년에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위원으로 활동했고 문예지 ‘문학공간’으로 수필가로 등단(1990. 8)도 했다.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장(1992∼1994)도 역임했다.

저서는 ‘개화기의 제문제’(조약돌, 1983), ‘국어교육론’(대학문화사, 1985), 2인 수필집 ‘억새의 노래’(도서출판 조약돌, 1985), ‘제주문화의 재조명’(일념, 1986), ‘제주유배문학연구’(도서출판 제주문화, 1992) 외 10여 권이 있으며 논문은 ‘濟州流配歌辭에 나타난 生活相’(제주대 논문집, vol 17, 1984) 등 50여 편이 있다.

슬하에 3남1녀를 두었고 제주대학교 교육학과 양진건 교수가 큰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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