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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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칸트는 상상력을, “직관 속에서 표상하는 능력”이라 했다. ‘직관’과 ‘표상’ 두 낱말을 조금만 연합해 보면 상상력이 문학 창작의 원천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시인 안도현은 어느 글에서 ‘낯설게 하기’를 말하면서, “삼겹살을 뒤집어라.”고 했다. 글이 글다우려면, 그 나물에 그 밥, 라면 먹고 이빨 쑤시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로 들린다. 시인 작가에게 문학은 자신의 생애를 상상력과 감수성에 의탁함으로써 잃어버린 ‘나’를 되찾고자 고군분투함일 것이다.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다. 의식을 따르다 보면 관념에 갇혀 의식 자체가 남루에 덮이고 만다. 상상력의 기력이 탄력을 잃어 낡아 버리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근원에 닿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은 한, 사람의 심성은 안팎으로 열려 있게 마련이다. 감성의 촉수가 돌기처럼 긴장돼 있을 때, 상상력의 파장도 활발해진다. 비단 창작만이 아니라 원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그러했을지 모른다.

나는 잠들지 않아 뒤척일 때가 많다. 글을 써야 한다는 책무감 때문일 텐데, 이런 밤이 잦은 데다 그것에 짓눌리는 무게가 만만찮다. 힘겨울 지경이다. 소재를 만나야 하는데 그게 잘 만나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조금 전까지 팔베개해 누웠더니, 어느새 감쪽같이 실종돼 버린다. 어디로 어느 쪽으로 도망질했는지 자국조차 없다. 머릿속이 휑하면서 감았던 눈을 뜨고 만다. 애써 붙였던 눈이 뜨이면서 잠은 출발점으로 돌아가 있다. 잠으로 가던 노역(?)이 그만 도로가 돼 버린다.

잠은 강청하면 멀리 달아나 버린다. 나는 그만 어기적거리며 상상의 언덕을 기어오른다. 다 잠든 밤의 고행(孤行)은 고행(苦行)이다. 언덕엔 풀이 무성해 눈 번쩍 뜨게 하는 풋풋한 푸나무들 향내로 진동한다. 실재한 나와의 극명한 대비, ‘초록은 밤에도 푸르구나.’ 느닷없는 빛, 초록은 단순하지 않다. 색을 걷어낸 ‘빛’이었다. 상기된 상상력이 내 손에 종이와 만년필을 찾게 하는 게 아닌가.

이제 더 푸르진 않아// 초겨울 마당 무서리거나/ 110고지 상고대거나/ 순일하게 하얀 눈밭이거나/ 저기/ 울울한 자작나무 숲// 한/ 풍경이네// 그냥 둘까/ 자라게(〈면도하다가〉 전문)

완만하게 흐르다 세차게 감돌아 내리는 물줄기 같은 게 상상력인가. 가파르게 내려 분출하는가. 그런 건가. 그 바람에 한 편의 시를 메모했다. 명상에 잠겨 영혼과의 대화를 받아쓰기하거나, 숲속을 거닐며 계절 속에 빠져들어 자연의 숨결을 들었거나, 철학에 사로잡혀 고뇌에 찬 진리 하나에 목말랐거나…. 우리 시맥(詩脈)을 이뤄 온 시인들은 사뭇 절박했으리라.

목월의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애수 어린 그 시대 우리의 자화상 ‘나그네’도, 미당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의 우리에겐 아득하기 만한 화자의 다른 얼굴 ‘내 누님’의 은유 국화꽃.

좀 깊이 들어온 것 같다. 시대를 풍미하고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시인의 상상력은 늘 따라오라 손짓하며 자극한다. 따라가려면 시늉을 해야 하니, 잠시 일상으로 눈을 돌려야겠다. 메모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개미의 주소는?”라 묻자, “허리도 가늘군 만지면 부서지리.” 이도 참 희한한 상상력 아닌가. 머리 굴리면 되는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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