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산수화에 고고한 정신세계 입힌 제주미술계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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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중해, 1959년 월간지 ‘사상계’로 등단…제주대 교수 등 역임
 양창보, 한국미협 지회장 등 지내…1979년 제주도문화상 수상
 양창언, 종교 항일 운동…1940년 징역 2년 선고받고 옥고 치러
 양창윤, 우도 출생…부산으로 건너가 독립 운동하다 징역 선고
 양창주, 국방과학연구소서 일하며 소총·기관총 국산화 등 연구
 양창현, 육군사관학교·인하대학교 前 교수…황조근정훈장 수훈
양창보의 작품 ‘독도장군암’. 양창보는 올곧은 사의에 바탕을 둔 관념산수화로 유명하다. 1979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제주대학교 교수, 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회장, 제주도문화재위원 등을 지냈다.
양창보의 작품 ‘독도장군암’. 양창보는 올곧은 사의에 바탕을 둔 관념산수화로 유명하다. 1979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제주대학교 교수, 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회장, 제주도문화재위원 등을 지냈다.

▲양중해梁重海:1927(일제강점기)~2010, 호는 현곡(玄谷),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장, 시인, 제주문화원장.

제주시 화북리(벨도) ‘거로-동네’에서 양선희(梁聖熙)와 어머니 나주김씨 우수(右修)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했고 부인 김진열(金鎭烈·조천)과 3남 1녀를 두었다. 중화민국 중화학술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사상계’ 시추천(詩推薦)으로 문단에 데뷔(1959년 7월)했다.

제주대학교 강사 및 교수(1961~1992)로 있었고 제주도문화상을 수상(1967)했다. 제주도문화재위원,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장(1982~1984),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장(1984~1986) 등을 지냈다.

제주농업중학교(6년제)를 졸업(1949)했고 세종(世宗)중학교원양성소(국어과)를 수료(1950)했다.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1957)해 일본 동경대학원 국어국문학 전문과정을 수료(1977~1979)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 에서 문학석사(1979~1981)를 학위를 받았다.

※양중해의 시 ‘弧線’=호선상에서/ 자라나는 거리를. 양 끝에 서서 들어다 보면/ 메아리 서글픈 상록수 숲 속 길,/ 두 점을 맺은 숨 찬 인력은/ 창공을 뻗는 칠색 무지개/ 나는 눈이 부시고/ 현기증이 인다./ 나는 너를 등지고/ 나를 너는 등지고/ 되돌아설 수 없는/ 숙명을 밟고 가면/ 연잔되는 거리는 그리움에 굽어드는 호선./ 자꾸만 멀어져 가는 거리를/ 자꾸만 가까워져 가는 거리를/

▲양창보梁昌普:1936(일제강점기)~2007, 미술가, 제주대학교 교수, 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회장, 호는 송암(松岩), 제주양씨 성주공파 사직공계(더럭양칩).

애월읍 애월리(하-물)에서 태어났다.

애월상고, 서울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제주대학교 교수, 한국미협 제주도지회장, 한국예총 제주도지회장, 제주도문화재위원 등을 거치면서 개인전을 22회 열었다.

양창보는 올곧은 사의(寫意)에 바탕을 둔 관념(觀念)산수화를 선보였다. 1979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다.

양 화백의 저서로는 ‘한국화의 표현기법 비교연구’와 ‘제주목물 조사연구’ 등이 있다.

아들 양건梁健(1965~)이 연대 건축과를 나와 가우건축을 운영하며 선친의 유지를 따라 미학(美學)에 몰입하고 있다.

▲양창언梁昌彦:1888(고종25)~1970,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양성택(梁聖澤)의 아들로 남원읍 신예리(새-예촌)에서 태어났다. 1917년경 보천교를 믿었으나 중도에 그만뒀다.

1936년 9월 중순 강석구(姜錫龜·58·봉개)의 권유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믿어 핵심 신도로서 포교에 활약했다.

1937년 12월 13일 검거돼 교주 강승태 이하 67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됐고 그 중에서 23명은 구속됐고 44명은 불구속으로 송치됐다.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하자 옥고를 치렀다.

▲양창윤梁昌允:1903(광무7)~1949(분단시대), 부산(釜山)에서 항일 활동, 본관은 제주.

양경보(梁敬普)의 차남으로 우도(牛島·연평리)에서 태어났다.

부산으로 건너가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일경에 탄로나 1932년 검거, 동년 7월 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양창주梁昌柱:1941(일제강점기)~1986,

애월읍 납읍리(과납)에서 양경윤(梁景允)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61년 3월 제주상업고등학교, 1965년 2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2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8월 한국과학원 기계공학 석사 학위, 1978년 6월 한국과학원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방무기 연구 중에서 불의의 폭발로 순직해 그의 자녀들에게는 종신(終身)장학금과 도미(渡美)유학 장학금이 특별히 지급됐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그의 전문경력을 보면 소총·기관총의 국산화 설계, 시제 및 시험평가 등 개발기술자로 참여, 발칸포(砲) 국산화 개발, 지대지(地對地) 유도탄(誘導彈) 발사대 개발, 해룡(海龍)체계 개발 및 체계 종합업무에서 최적(最適) 설계기법과 무기체계 선정, 7년 동안에 걸쳐 matrix 조직운영과 시험평가 등 연구 개발, 함대함(艦對艦)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

▲양창현梁昌鉉:1934(일제강점기)~2010, 육사 수석 졸업, 공학박사, 대학교수, 제주양씨 성주공파 천호공계(가령파), 애월읍 납읍리(과납) 양경윤(梁景允)의 큰아들.

1954년 제주농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미국 MIT대학 공학석사, 미국 알라바마대학원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있었고 육군대령으로 전역했다.

1979년 보국훈장(保國勳章) 3·1장, 1981년 대한토목학회 학술상, 정년퇴임 때 황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양창현은 인하대학 공대교수, 중앙건설기술 심의위원, 대한토목학회 이사 및 구조위원장도 역임했다.

저서로는 ‘구조역학’과 ‘응용역학연습’ 등이 있다.

▲양처대梁處大: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1739년(영조15) 5월, 오명계(吳命季)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40년 1월에 떠났다.

재임 중 풍랑으로 파선된 사건이 발생, 이때 이를 긴급 구제한 일이 알려져 그 공로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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